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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kakaocdn.net/dn/dtbLDV/btsMd7MS5KL/vknV9VzKRTfDqolEcQY2Rk/img.jpg)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종가, 혹은 서원 같은 데서 빠지지 않은 공간으로 장경각藏經閣이 있다.
물론 이 장경각은 경판각이니 하는 다양한 이름으로 일컫기도 하니,
예컨대 권문해가 편찬한 백과전서 대동운부군옥 목판을 보관하던 공간은 초간정草澗亭이라 해서 마치 정자처럼 일컫지만 실제로는 장경각이다.
이 장경각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내가 보건대 제대로 접근한 글이 없다.
그렇다면 장경각은 무엇인가?
사당이다!
신주다!
이 장경각은 예외가 없지는 않지만, 서원이나 해당 종가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사당 인접지점에 위치한다.
신성공간이라는 뜻이다.
![](https://blog.kakaocdn.net/dn/bbVdYr/btsMfdyvZOk/lNUu5zOz98LLpN7jH9zMKK/img.png)
이는 장경각이 지니는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장경각과 목판은 어떤 관계인가?
바로 이런 질문을 던지는 데서 우리는 왜 조선시대가 그토록 목판에 목을 매었는지 그 의문을 푼다.
저 장경각은 예외가 없지는 않겠지만 근간에서는 해당 문중을 대표하는 인물의 문집,
더욱 정확히는 찍어낸 인쇄물이 아니라, 그것을 찍어내는 전단계인 목판을 모신 공간이다.
목판을 두는 공간이 아니라 봉안, 곧 모시는 공간이라는 데서 장경각이 지닌 독특한 의미가 만천하에 폭로한다.
왜 목판인가?
그건 조상신 자체였다!
목판과 그것으로 찍어낸 인쇄물은 시조 혹은 중시조와 그에서 비롯한 후손 지류의 관계와 똑같다.
책 자체를 신주로 모신 흔적이 없으나, 그것을 찍어낸 목판은 그 자체가 신주였다.
왜 조선시대에 목판을 만들지 못해 환장했는가?
답이 자명해졌으며, 이것이 바로 조선시대 목판이 성행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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