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레드 모하마드 알 아사드 Khaled Mohamad al-Asaad (1932. 1~2015. 8. 18)는 시리아 고고학자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고대 도시 팔미라Palmyra의 고대 유물 책임자로 40년 넘게 이 일을 하고 은퇴생활을 하던 중
팔미라가 시리아 내전에 휘말리고 팔미라 지역이 수니파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단체 ISIS에 점령된 2015년 8월 18일, 83세로 그들한테 공개 참수됐다.
2015년 5월, 팔미라와 소재하는 시라아 사막 오아시스 도시 타드무르Tadmur가 ISIS한테 공격당하자 시리아 정부는 팔미라 박물관 소장 문화재들을 다마스커스로 대피하게 된다.
하지만 그 많은 유물을 한꺼번에 다 옮길 수 없었으므로 일부만 빼내서 옮기고는 미쳐 그러지 못한 유물들을 다른 데로 피신케 한 듯하다.
알 아사드는 저 무렵 이미 은퇴한 상태지만, 급박한 상황에 유물 대피를 도왔다.
도시를 점령한 IS는 그를 체포하고서는 유물을 숨긴 데를 불라면서 저 팔순 노인을 한달간이나 고문했다.
그는 이에 저항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 그를 IS는 2015년 8월 18일 팔미라에서 공개처형한다.
당시 뉴욕 타임스 보도는 이랬다.
몇 주 동안 그를 구금한 뒤 지하디스트들jihadists 은 화요일 그를 광장으로 끌고 갔는데 그곳에서 가면을 쓴 검객이 군중 앞에서 그의 머리를 잘랐다고 아사드 씨 친척들이 말했다.
이슬람 국가 지지자들이 소셜 미디어에 배포한 사진에 따르면, 그의 피에 젖은 몸은 신호등에 빨간 끈으로 매달려 있었고, 그의 머리는 발 사이 땅에 놓여 있었으며, 안경은 여전히 착용하고 있었다.
그가 사망하고 IS는 그의 "범죄"를 열거한 플래카드를 그의 시신에 걸었다.
"배교자[아포스타apostate]"로서 "이교도 회의"에서 시리아를 대표하고, 팔미라에서 "우상 숭배 책임자"였으며, "이교도 이란"을 방문하고, "시리아 보안군에 근무하는 한 형제"와 소통했다는 죄목이 그것이었다.
그의 시신은 팔미라(타드무르)의 새로운 구역에 전시된 후 IS가 파괴한 고대 유적에 전시된 것으로 알려졌다.
2021년 2월, 시리아 정부 소식통은 팔미라에서 동쪽으로 10km 떨어진 한 시골에서 그의 시신을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그와 함께 DGAM 연구소 부국장인 Qassem Abdullah Yehya 또한 팔미라 유적 보호활동을 하다 2015년 8월 12일 근무 중 IS에 체포되어 살해되니 그의 나이 37세였다.
알 아사드가 총살된 이유 중 하나로 그의 정치 성향이 꼽히기도 한다.
그는 알려지기로는 시리아 사회주의 바타당 Syrian Socialist Ba'ath Party에 1954년 가입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집권 시리아 바샤르 알 아사드 정부의 열성적인 지지자인지는 불확실하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몇몇 사람이 그가 아사드 Assad의 굳건한 지지자였다고 주장했다 한다.
시리아 고대 유물부 책임자 마몬 압둘카림 Maamoun Abdulkarim 은 알 아사드의 죽음을 비난하며 그를 "팔미라와 역사에 기억에 남는 봉사를 한 학자"라고 일컬었다.
이탈리아 문화관광부 장관 Dario Franceschini는 모든 이탈리아 박물관 깃발이 그를 기리기 위해 조기로 게양될 것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유네스코와 유네스코 사무총장 이리나 보코바Irina Bokova는 알 아사드 살인을 비난하면서 "그가 팔미라에 대한 깊은 헌신을 배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그를 죽였다. 이곳이 그가 자신의 삶을 바친 곳이다"라고 평가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팔미라에서의 살인과 파괴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페르시아계 미국 시인 Kaveh Akbar는 al-Asaad 죽음에 대한 응답으로 "팔미라Palmyra"라는 시를 출판했다.
그 헌정 문구는 "Khaled al-Asaad 이후 after Khaled al-Asaad"였다.
팔미라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평생을 보낸 알 아사드는 다마스커스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팔미라 유적 발굴 복원의 산증인이었다.
1963년에 그곳 관리책임자가 되어 40년 동안 2003년 은퇴했으니 그 자리를 그의 아들 왈리드Walid가 물려받았다.
알려지기로 부자가 다 같이 체포 구금됐다가 아버지는 처형되고 아들은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 관리소장으로 일하면서 미국, 폴란드, 독일, 프랑스, 스위스 고고학 팀과 협력을 이끌어 냈고 무엇보다 팔미라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아람어에 능총한 그는 2011년까지 정기적으로 그 텍스트를 번역하기도 했다.
1974년 이후 계속 팔미라 유물 전시회를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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