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문화 이모저모

[가자假子, 전군殿君으로 가는 길목] (1) 아들에게 절을 하는 이사부

by taeshik.kim 2023. 11. 3.
반응형
조선시대 왕과 그 자식. 같은 자식이라지만 엄마에 따른 차별은 엄청났다. 신라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정비 자식이나 후궁 자식이냐에 따라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화랑세기
전편에 걸쳐 자주 출현하는 전군殿君은 그 어디에도 개념 설명이 없지만, 그 용례를 추리건대 왕자王子의 봉작封爵 한 부류다. 왕자는 무엇인가? 왕의 아들이다.

하지만 왕자 역시 엄연한 신분제 사회에서 등급이 있을 수밖에 없다. 왕자들은 어머니가 정궁正宮이냐 아니냐에 따라 등급이 갈라졌다. 정궁 소생은 왕자王子라 한 듯하다. 이 정궁 소생 왕자 중에 다음 보위를 이을 이가 점지되었으므로, 그를 일러 태자太子 혹은 세자世子라 한다.

정궁 소생 이외의 왕자, 그러니 후궁 소생 왕의 아들들을 《화랑세기는 전군殿君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에서도 조심할 대목이 있다. 왕자 혹은 태자라 해도, 그 어떤 소용돌이에 휘말려 신분이 강등될 수 있으니, 이런 왕자들도 전군이라 부른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그가 왕자냐 전군이냐는 기준은 철저히 지금 왕과의 혈연적인 관계에서 결정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원칙 혹은 법칙일 뿐이고, 그것이 운용되는 과정에서는 항용 변칙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굳이 예외없는 법칙없다는 진부한 말을 빌릴 필요조차 없다.

이런 변칙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이가 6세 풍월주를 역임한 세종世宗과 그의 아들로 11세 풍월주를 지내는 하종夏宗이 있다. 이들 부자父子는 왕의 아들들이 아님에도 어쩌면 "참람하게도" 전군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지소는 공주였다. 삼촌인 입종한테 시집가서 진흥을 낳았으나 이내 청상과부가 되어 여러 남자를 끌어들여 자식을 양산하니 개중 한 명이 세종이었다.



6세 세종 전에 의하면, 그는 어머니가 입종立宗갈문왕비요, 법흥왕의 딸이며,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태후다. 아버지는 그 유명한 태종苔宗, 다시 말해 이사부다. 따라서 세종은 진흥과는 어머니가 같고, 아버지가 다른 이부동모異父同母 형제다. 나이는 진흥이 많아 형이다.

세종이 전군이 된 일은 원칙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가 아무리 태후의 자식이라고 해도, 왕의 자식은 아닌 까닭이다. 물론 모계 기준으로 그의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면, 할아버지는 법흥왕이므로 전군이 꼭 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부계 우선주의가 작동하는 시스템에서 분명 그에게 전군 지위를 준 일은 변칙이었다.

《화랑세기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지만, 세종을 전군으로 삼은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그 어머니 지소태후였다. 7세에 즉위한 진흥왕 즉위 초반기 지소는 수렴청정을 했으므로, 이런 막강한 권력을 기반으로 자기 아들을 전군으로 삼은 것이다.

전군이 신라사회에서 어떠한 위상을 지녔는지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세종 전에 보인다. 이사부는 아들 세종의 부축을 받으면서 진흥왕을 알현하면서, 왕에게 먼저 절한 다음, 자기 아들인 세종에게도 절을 했다. 이에 놀란 세종이 "아버지 대체 왜 이러십니까?"라고 묻는다. 이 장면을 지켜보는 진흥은 이렇게 말한다.

"이 노인께서 비록 중신重臣이기는 하지만, 나에게는 신하다....(탈락)...몸으로는 너에게 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사부는 당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이었다. 아마 이 무렵에 상대등上大等이었을 것이다. 백발이 성성한 이런 그도, 사사롭게는 세종이 자기 아들이지만, 전군인 까닭에 절을 해야 했던 것이다. 이처럼 전군과 신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옹벽이 있었던 것이다.

한데 저런 장면들을 지켜본 이사부의 대답 혹은 설명은 전군 시스템에 대한 원리를 우리로 하여금 간파케 한다.

"태후太后는 신성하시니 지아비 없이도 전군殿君을 신화神化할 수 있습니다. 전군은 신자神子입니다. 어찌 감히 신하가 아버지가 되겠습니까?"

태후는 절대지존이다. 그런 태후에게서 낳은 아들은 씨가 누구건 태후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자체 신성성을 지닌다는 맥락이다.

신라 왕족은 어느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신성 골족骨族이었다. 이것이 바로 성골이다. 물론 그렇다 해서 세종이 성골이었으냐? 나는 다르게 본다. 하지만 이사부의 이 말은 실은 변칙이었다. 씨내리는 남자가 누구건 상관없이 태후는 그 자식을 전군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은 언뜻 겸양하는 뜻으로 보이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나아가 태후는 신성해서 전군을 신화할 수 있다는 것은 이것이 변칙임을 폭로한다. 이변異變이었다. 그 이변을 이사부가 옹호하고 나선 것이다. 이사부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아가 이사부로서는 자기 자식이 신성한 전군이 됨으로써 그 자신 역시 그 반열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이런 사실을 노회한 이사부가 모를 리 없었다. (2017. 11. 3)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