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위 기간이 장장 37년에 이르는 진흥왕에게 재위 12년은 획기를 이루는 해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540년, 조부인 법흥왕이 죽고 즉위할 적에 그의 나이 불과 7살이라 했거니와, 따라서 재위 12년, 서기 551년은 그로서는 비로소 어머니 지소의 품을 떠나 친정親政을 개시하기에 이른다.
삼국사기 해당 본기에 이르기를 신라가 이해 봄 정월에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꿨다고 하거니와, 이 개국은 바로 진흥왕이 막강 배후권력 지소태후의 수렴청정을 마침내 걷어내고, 신라를 직접 통치하기에 이른 사실을 웅변한다. 개국, 글자 그대로 나라를 새로 열었다는 뜻 아닌가?
친정 체제에 들어섰음을 증명하고자 했음인지, 그 개시와 더불어 진흥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대외 정벌이었다.
정월을 맞아 할아버지 법흥 이래 죽 사용한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개국으로 대신한 진흥은 바로 그해 3월에 對 고구려 공격 명령을 내린다.
진흥왕본기 이해에는 이 일을 "왕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니, 이긴 기세를 타고 10개 군을 취했다(王命居柒夫等, 侵高句麗, 乘勝取十郡)"고 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을 전하는 전조다. 백제와 합세한 신라는 한강 유역 일대를 장악한 고구려를 마침내 북쪽으로 내몰고는 그 점령지를 각기 나누어 먹었으니, 백제가 그들의 고토 한강 하류 유역을 차지한 반면 신라는 그 중상류 유역을 편입한 것이다.
이를 발판으로 몇년 뒤 신라는 마침내 백제가 수복한 한강 하류 유역까지 손아귀에 넣음으로써 소백산맥을 넘어 남한강 유역을 내려가 한강 유역을 통해 서해로 진출하는 길을 열게 된다.
이 정벌전쟁은 같은 삼국사기 거칠부 전에 좀 더 자세한 사정이 보인다.
"12년 신미辛未에 王이 命하여 居柒夫를 필두로 구진仇珍 대각찬大角飡·비대比台 각찬角飡·탐지耽知 잡찬迊飡·비서非西 잡찬迊飡·노부奴夫 파진찬波珍飡·서력부西力夫 파진찬波珍飡·비차부比次夫 대아찬大阿飡·미진부未珍夫 아찬阿飡 등 여덟 장군에게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치게 하니, 백제인이 먼저 평양平壤을 공파하고, 거칠부 등이 승세를 타고는 죽령竹嶺 바깥 고현高峴 이내 열개 군을 취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첫째, 이 전쟁이 신라로서는 국운을 건 총력전이었으며, 둘째 신라본기가 말한 '승승乘勝', 다시 말해 이긴 승세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이 총력전이었다는 사실은 이 전쟁 신라군 진용을 통해 드러난다. 신라본기는 물론이려니와, 거칠부 전에서도 이 전쟁 신라군 총사령관은 거칠부로 등장한다. 다만 유의할 점은 이것이 거칠부 중심으로 기술된 까닭에 그리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떻든, 이 전쟁 당시 거칠부 관위는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거칠부 전에는 이보다 6년 전인 진흥왕 재위 6년(545) 가을 7월에 이찬 이사부의 건의에 따라 국사國史를 편찬할 적에 그 총임자로 거칠부가 임명되었을 당시 그 당시 관위가 대아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 6년 뒤 거칠부는 이보다 관위가 더욱 올랐을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고구려 정벌에 나선 신라군은 진용을 8개 군으로 편성했다. 아마도 총사령관 거칠부가 진두지휘하는 군단이 중앙 군단을 형성했을 것이니, 이들 8개 군단 중 일부, 아마도 4개 군단 정도가 백제군과 합세해 평양을 먼저 쳤을 것이다.
이 전쟁에서 우리는 흔히 백제군이 한강 하류 유역, 신라군이 한강 중상류 유역으로 갈라서 공격을 개시했다고 배웠지만, 웃기는 개소리다.
신라군은 백제군과 합세해 우선 평양성을 들이쳤다. 평양을 봉쇄함으로써, 평양이 일선 군부대와 명령이 전달되는 시스템을 붕파한 것이다. 요컨대 고립 작전을 써서, 고구려 조정에서 명령이 하달되는 통로를 끊은 것이다.
그 사이 중앙 보급로가 끊긴 한강 중하류 유역을 신라 정벌군 나머지가 들이쳐서 10개 군을 탈취하는 대 전과를 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긴 기세를 타고 10개 군을 탈취했다'는 말이었다.
나아가 그 직후 신라가 곧바로 백제 공략에 나선 이유도 쉽사리 알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전쟁은 백제의 허점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에서 드러난 백제군 진용은 신라로서는 전연 위협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신라를 이를 간파했다.
이 정도면 쉽게 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직전까지의 동맹국 백제에 칼을 겨눈 신라는 그 전쟁에서 한강 유역을 완전 탈취한 것은 물론 그 수괴 명농왕까지 사로잡아 참수하기에 이른 것이다.
대 고구려 신라 정벌군 수뇌를 이룬 자들을 보면, 지금 이 순간에 관위가 확인되지 않는 거칠부를 필두로 대각찬大角飡, 각찬角飡, 잡찬迊飡, 파진찬波珍飡, 대아찬大阿飡, 아찬阿飡이다.
소위 당시 신라 조정에선 난다긴다는 이는 망라한 진용이었으니, 신라가 이런 진용을 다시 갖추는 데는 백년이 걸렸으니, 백제 씨말리기에 나선 660년 전쟁이 그것이었다. 이때 신라군은 총사령관 김유신의 지휘 아래 28 장군이 포진했다.
30장군이라는 이설도 삼국사기에는 보이나, 28장군이 맞다. 8장군이나 28장군은 모두 동아시아 천문우주관에서 유래한 군단 편성이다. 30장군은 나올 수가 없는 발상이다.
이렇게 화려한 진용을 갖췄다는 말은 이 전쟁이 신라로서는 총력전이었다는 의미다. 이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니, 그 승리를 이끌어낸 거칠부는 그야말로 그 명성과 권위가 신라를 진동했을 것임을 말할 나위가 없다.
거칠부 이하 8장군은 관위 순서로 등장한다. 그 넘버 2가 대각찬 구진仇珍이다. 구진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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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한테 물려죽은 진흥왕의 태자] (2) 폐위되는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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