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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마왕퇴馬王堆에 미친 나날들 (1) 부의를 말하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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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퇴 백서 중 태산서胎産書

 
이 THE HERITAGE TRIBUNE 맹렬 필진인 신동훈 교수도 그렇고 나 역시 그렇지만, 마왕퇴 한묘 馬王堆漢墓에 혹닉 중이다. 각자 접근 이유는 다르지만, 이를 연구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에는 다름이 있을 수 없다.

신 교수 쪽이야 아무래도 미라에 대한 관심에서 촉발했고, 시종 의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지만, 사람 욕심이 어디 그런가? 내가 의학적 관점에서 관심을 촉발했다 해도 결국은 인문학 총체라, 결국은 문화사학 전반 영역으로 관심이 확장할 수밖에 없고, 그래야 내가 원하는 정보를 폭넓은 시각에서 캐낼 수 있는 까닭이다. 

저 마왕퇴 한묘는 나로서는 첫째 그 발굴 과정과 그것을 둘러싼 정치역학이라는 관점에서 위선 관심을 끌었고, 둘째 그 고고학적 성과 자체가 또한 관심이었으며, 셋째 그에서 출토하는 무수한 문자자료가 관심이었거니와, 개중에서도 방중술 관련 문건은 내가 당시 전력을 투구한 신선도교와는 뗄 수가 없어서였다. 

고고학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 내가 얻은 바 중 하나를 다시금 강조한다. 이 무덤 출토 유물 양상을 보면 목패니 해서 공헌물이라 할 만한 것들에 안내판이 붙어 있다. 이 안내판은 성격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기본으로는 누가 어떤 부의 용품을 냈는가에 대한 표식이다. 

이 대목을 발견하고는 나는 무릎을 쳤다. 왜인가? 순자라든가 예기라든가 묵자니 하는 고대 문헌을 보면, 장례에는 필히 부의를 동반하거니와, 이는 요즘 한국사회에도 마찬가지라, 그냥 장례식장에 가서 조문하는 사람 없다. 부의금이라 해서 반드시 돈을 내놓기 마련이라, 이 전통을 증언하는 일대 증언들이 바로 저들 문헌이었다. 

이 경우 특히 문제가 묵자였으니, 묵자는 이른바 후장厚葬을 선호하는 유가에 견주어 박장薄葬을 강요했으니, 그런 신념에 따라 당시 후장 습속을 맹렬히 비판한다. 이 대목을 잘 읽어보면, 당시 장례식에서 특히 권력자의 경우는 부의품이 산더미처럼 쌓였으며, 그것들이 결국 껴묻거리로 갔다는 사실을 안다. 

이런 증언을 마왕퇴 발굴성과는 고스란히 실물로써 증언하고 있었다. 

이 의문이 풀리고 보니, 한국고대사, 특히 신라 가야 고고학과 사리 공양을 둘러싼 모든 의문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 내가 지진구 진단구를 비판하는 이유도 이참에 확실히 밝혀야겠는데, 바로 저에서 비롯한다. 

한국고고학 혹은 불교고고학 혹은 불교미술사는 걸핏하면 진단구 운운하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지금 이 순간까지 해대는데, 사찰 혹은 탑 주변에서 출토하는 매장 유물들은 진단구랑은 눈꼽만큼도 관계없고 모조리 부의품이다.

왜인가? 탑파는 근간에서 부처님 무덤이라, 그 매장 패턴은 동시대 장송 의례와 똑같다. 

그 진단구 지진구 유물이라는 것들은 부처님 장송에 즈음해 그에 참관한 사람들이 낸 조의품, 곧 공양물인 것이다. 그것을 묵자를 필두로 하는 문헌 증언과 마왕퇴 유물을 분석하면 실로 자명하게 알 수 있다. 고고학 기본 중의 기본인 상식이다. 이런 상식도 모르고서 진단구 지진구 운운하는 양태가 나로서는 역겹기 짝이 없다. 

이 탑파 세우기에 즈음한 공양 양태를 알면, 주부곽 시스템을 실로 싱겁게 푼다. 왜 신라 혹은 가야 무덤에서는 주곽과 부곽을 나눴던가? 

부곽이 뭔가? 간단하다. 껴묻거리만 묻기 위해 마련한 별도 공간이다. 그 껴묻거리는 도대체 출처가 어디인가?

간단하다. 부의품들이다. 따라서 부곽에 묻은 물품은 물론 예외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근간에서는 장례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낸 물품을 모아 놓은 곳이다. 그에 견주어 주곽에 넣은 물품들은 상주가 준비한 것들이다. 

이 시스템을 모르니 엉뚱한 소리들만 지껄이게 된다. 

마왕퇴 한묘가 중국 유산?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나한테는 중국 한국 하는 국경이 없다. 내가 필요한 정보를 습득하고자 나는 로마도 보고, 켈트도 파는 중이며, 에트루리아 무덤도 찾아다닌다. 

저 마왕퇴가 나한테는 곧 삼국사기요 삼국유사이며, 신라 적석목곽분이기에 미친 듯이 파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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