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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개한테 물려죽은 spinoff] (2) 551년 전쟁에서 무엇을 읽어낼 것인가?

by taeshik.kim 2023.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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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유역을 누가 차지할지를 두고 신라 고구려 백제 3국이 모두 개입한 551년 전쟁은 흔히 신라와 백제 연합군에 의한 한강 유역 탈취 혹은 수복이란 관점에서 역사가들이 대서특필하기는 하나, 내가 볼 때는 이는 원숭이 궁둥이는 빨갛다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단순한 팩트 서술에 지나지 아니한다. 

그것이 못내 쪽팔리다 생각했음인지, 이 한강 쟁탈전에서 궁극의 승리자가 되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발판을 마련했니 하는 식으로 의미 부여를 하기도 하나, 이 또한 원숭이 똥도 냄새가 난다는 말만큼이나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췌언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전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먼저 신라의 관점에서 이 전쟁을 분석한다. 

신라가 이 전쟁을 일으킨 시점은 540년에 불과 7세로 즉위한 김진흥金眞興이 재위 12년째를 맞아 18세가 되어(윤석열 나이로는 17세) 어머니 지소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비로소 친정親政을 개시한 시점임을 하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 해서 신라가 오로지 진흥왕 한 사람의 결단으로 고구려를 향해 일대 전쟁을 도발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가 얼마나 야망이 있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그런 야망을 뒷받침할 만한 지지세력이 어느 정도는 든든해야 했으며, 이런 지지가 없이는 저와 같은 총력전을 일으킬 수는 없다. 

첫째 야망이라는 관점에서 이후 진흥왕이 전개하는 양상을 보면, 대단한 야심가라는 인상이 짙다. 그런 야심이 한 순간에 싹 텄겠는가?

나름대로는 7살 강보에 얹혀 왕이 되기는 했지만, 12년을 엄마 치마폭에서 그냥 지내지는 않았을 터이며, 철저한 제왕 교육을 받았을 것이며, 이를 통해 정치의 냉혹성도 절감했으리라 본다. 

둘째 이러한 그의 야망을 지지하는 세력이 누구인가 하는 점도 중요하다고 본다. 그의 엄마 지소가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해도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어니와, 이런 백을 바탕으로 그의 주변에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주류가 포진하기 시작했으니, 역사에 드러난 주류가 저때 신라군 진용 선두에 선 8장군이라 본다.

다시 말해 대각찬 거칠부를 필두로 같은 대각찬 구진仇珍·각찬 비대比台·잡찬 탐지耽知·잡찬 비서非西·파진찬 노부奴夫·파진찬 서력부西力夫·대아찬 비차부比次夫·아찬 미진부未珍夫가 그들일 수밖에 없다. 

저와 같은 국가 명문을 건 전쟁에 왕은 자신이 믿을 만한 장수를 내보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전쟁이 신라 혹은 진흥왕으로서는 진짜로 중요성을 띠는 까닭은 저렇게 총공세를 펴고도 전과가 시원치 않거나, 패전했을 경우 뒷감담을 장담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있다. 이는 진흥왕으로서는 일대 도박일 수밖에 없었던 선택이었다.

이제 막 친정을 개시한 청년왕이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켰는데, 혹 실패했다? 혹 어떤 누가 대타로 희생될 수도 있겠지만, 이 전쟁을 승인한 군 통수권자가 진흥임을 다 아는 마당에 그런 꼼수는 통할 수가 없다. 

우리의 의문은 바로 이에서 비롯한다. 그럼에도 왜 이 all or nothing 도박을 진흥은 감행해야 했을까? 

단순한 힘의 과시? 천만에. 그러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나는 새로운 권력이 출현했음을 알리는 팡파르였다고 본다. 이 새로운 권력의 출현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방법으로 전쟁 만한 도구는 없으며, 더구나 그에서의 완승 같은 선전효과는 없다. 
 

단양 적성비

 
그랬다. 18세 청년왕으로 정치적 야심으로 똘똘 뭉친 김진흥은 친정 개시와 더불어 국민 총동원령을 내리고는 고구려를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국경 밖을 벗어나서는 네 마음대로 휘하 장수와 사졸들은 참수하라는 징표로 도끼를 총사령관 거칠부한테 건네 주면서 서라벌 땅에서 대대적인 출정식을 치르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는 나아가 한편으로는 진흥으로서는 왕위가 매우 불안했다는 증좌일 수도 있다. 저런 전쟁을 벌이지 않고서는 새로운 권력이 출현했음을 알릴 만한 마뜩한 선전도구가 없었다는 것은 그만큼 친정 개시 당시 권력 기반이 취약했다는 증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역사가들이 간과했다. 

그의 이런 도박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전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하도 기술이 간략해서 알 수는 없지만, 파죽지세 아니었던가 한다. 순식간에 10개군을 함락하고 수중에 넣었기 때문이다. 

이 화려한 전과를 안고 거칠부 이하 8장군이 개선했을 때 서라벌 광장에서는 대대적인 개선식이 열렸다. 이 개선식 정중앙을 정좌한 18세 청년왕.

이 모습 상상이나 되는가? 누가 이 대전과를 거칠부의 승리라 하겠는가? 대왕 만세라는 함성이 서라벌을 진동케 했다. 

이제 그의 앞길을 가로 막는 정적은 다 사라졌다. 이 전쟁 하나로 신라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권력이 출범했음을 알렸다. 숨 죽이고 있던 그의 반대파들도 이제는 장막 뒤에서 다 기어나와 충성을 맹세했다. 

고구려로서는 이 전쟁이 어떠했는가? 볼짝 없다. 개망신이었다.

신라군에 10개군을 탈취당하고, 한강 하류 유역은 백제한데 다 뺐기고 평양으로 쪼그라 들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 개망신이 고구려 국내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 부분은 추후 다루기로 하지만, 언제나 이런 대패에는 그 책임 소재를 둘러싸고 비린내나는 권력투쟁이 일기 마련이다. 

또 하나 우리가 생각할 점은 이렇게 고구려가 맥없이 무너졌을까 하는 의문이다.

아무리 신라 백제 진용이 강하다 한들, 지키는 쪽이 이렇게 맥없이 무너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구려로서는 순식간에 당한 일이다.

왜 그랬을까? 볼짝 없다. 고구려가 맥없이 무너졌다는 것은 고구려가 탈취당한 저들 지역 지배가 철저하지 못했다는 반증 아니고 무엇이랴? 

그랬다. 고구려의 한강 유역 일대 지배는 허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냥 점령군이 들어와 점령군 행세를 할 뿐, 민심을 얻는 데 실패했다. 저리 순식간에 무너지 까닭은 민심은 아무도 고구려를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단하다. 저들 지역을 고구려가 지배한지는 얼마 되지 아니해서, 그 지배질서의 강고한 구축이 채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저렇게 순식간에 무너진 것이다. 

고구려가 475년 전쟁으로 한반도 중부 일대를 지배해? 그렇게 해서 80년이나 된 왕조가 저렇게 처참하게 무너질 수 있는가? 

말 같은 소릴 해야 믿는 척이라도 해 줄 게 아닌가?

고구려는 기껏해야 저들 지역을 잠시간 점령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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