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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거란의 치맛바람] (2) 북송을 직접 정벌한 경종비 소작蕭綽

by taeshik.kim 2023.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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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3년 고려거란전쟁 지도

 
요遼나라 제5대 황제 경종景宗 야율명의耶律明扆(재위 969~982) 정비 예지황후睿智皇后는 거란 모든 왕비족이 그렇듯이 소씨蕭氏이며 이름은 작綽, 어릴 때는 연연燕燕이라 일컬었으니, 북부재상北府宰相 소사온蕭思溫의 딸이다. 

야율명의가 황제가 되면서 귀비貴妃가 되었다가 황후로 책봉되어 훗날의 황제 성종聖宗을 낳는다. 두 모자, 곧 예지황후와 성종을 우리가 특히 더 기억해야 하는 까닭은 고려거란전쟁을 도발한 직접 당사자들인 까닭이다. 

남편 경종이 죽자 아들 야율문수노耶律文殊奴(972~1031)가 즉위하니 이가 훗날 성종聖宗이라 일컫는 거란 제6대 황제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문수노는 982년 즉위 당시 12살 꼬맹이였다. 윤석열 나이로는 두 살 깎여 만 10살에 지나지 않았다. 

동아시아 전통 왕조 시대는 보통 새로운 황제의 시대는 즉위한 그해가 아니라 그 이듬해를 첫해로 친다. 즉위한 그해는 전왕 죽은 해라, 이해는 옛왕의 시대로 쳤으니 말이다. 

이런 전통에 따라 성종의 시대는 즉위한 이듬해 983년에 시작한다. 새로운 황제가 즉위했으니 연호도 바꾸어야 한다.

왜?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시간처럼 명징하게 알려주는 게 있겠는가? 시간을 교체함으로써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천하에 공포한 것이다.
 

1018년 고려거란전쟁. 이 전쟁은 거란으로서는 참패였다.

 
이리해서 그의 즉위식과 더불어 983년 새로운 연호를 선포하게 되는데 통화統和였다. 두루 화합을 추구한다는 뜻이었다.

거란 200년 역사를 통털어 가장 위대한 군주로 평가되는 그의 시대가 화합을 추구했을지는 모르나, 실상 그 평화는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는 트럼프식 평화였다. 

단순히 연호만 바꾼 것이 아니라 나라 이름도 바꾸었다. 그 이전 나라 이름은 대요大遼였지만 대거란大契丹으로 개칭했다. 이 왕조 터전인 요수遼水에서 기원하는 이름을 종족을 앞세운 이름으로 교체한 것이다. 

이 성종 시대가 특이한 점은 보통 왕이 성년(문화권별로 다르기는 하지만 18~20세는 보통 성년으로 쳤다)이 되면 엄마나 섭정 자리를 물러나고 이제부터는 너가 직접 통치하라고 뒷방 늙은이로 물러나는 게 관례지만, 그의 엄마 예지황후는 그리할 생각이 전연 없었다. 

죽을 때까지 1009년, 죽을 때까지 실상 황제 위의 황제 상황上皇이었고, 국권을 다 틀어쥐었다. 그러니 성종은 서른줄에 들어서고 나서야 그 자신의 꿈을 펼치게 된다.

그나마 성종한테 다행인 점은 재위 기간이 유례없이 길어 엄마가 죽고 나서 친정을 개시하고서도 20년을 더 살고는 1031년에야 눈을 감았다는 사실이다. 

아들이 황제가 되고 연호를 개정한 통화統和 원년元年, 이제는 왕의 마누라가 아니라 엄마가 되었으니 새로운 존호를 받게 되는데 신하들이 논의해서 올린 새로운 이름이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 하늘을 대리한 황제의 엄마라는 뜻이다.

24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살아 있었으니, 이때 황제랑 신하들은 다시 존호를 바치는데 예덕신략응운계화승천황태후睿德神略應運啟化承天皇太后라, 지혜롭고도 덕이 있으시며, 신비로운 책략을 갖추시고 하늘의 운수에 응하여 화합을 여신 승천황태후 라는 뜻이다.

그로부터 3년 뒤 통화 27년 붕서하게 되니, 이때는 시호를 올리게 되는데 그가 받은 이름은 성신헌황후聖神宣獻皇后였다. 
 

동란왕 출행도. 이런 자료들 자꾸 보니, 대만이랑 만주가 자꾸 땡긴다. 다시 날러?

 
 
어린 아들이 황제가 되고 그 자신은 섭정이 되었지만,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강성한 황족들이 언제 쳐들어 와서 자신과 아들을 밀어낼지 몰랐으니 살얼음판이었다.

이때 심정이 요사遼史 권63 열전 제1 후비後妃에 남았으니 이 대목을 이리 증언한다. 

경종景宗이 붕어하자 황태후로 높여지고 국정國政을 총섭했다. 황태후가 울면서 말했다. “어미는 과부요 아들은 연약하며, 족속族屬(황족)은 강성하고 변방은 안정되지 않았으니 이를 어찌 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때를 노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재빨리 시류에 편승해 어린 황제를 옹위하며, 섭정인 황태후를 도와 한 시대를 풍미하자는 신하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소작 섭정시대도 역시 그랬다. 이 대목 같은 열전 기술이다. 
 
“(저런 탄식을 듣고서) 야율사진耶律斜珍과 금덕양錦德讓이 아뢰었다. ‘신들을 믿으신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사옵니까?’”

이런 대답을 기다린 황태후는 옳거니 하면서 큰 일은 사진斜珍, 덕양德讓과 논의해서 처결하는 한편 월휴가越休哥한테는 남쪽 변방에 관한 일(아마 송나라 문제인 듯)을 맡겼다고 열전은 덧붙인다.

따라서 그의 섭정 시대를 논할 때는 저 세 사람을 빼놓을 수는 없다. 
 

거란 여인들.아마 시종들일 것이다.

 
그의 시대를 요사 열전은 이렇게 평가한다. 

“황태후는 다스리는 방법을 잘 알아서 좋은 말을 들으면 반드시 따랐으니, 그런 까닭에 뭇 신하는 다 충성을 다했다. 군사를 다스리를 방법도 익혀 잘 알았으니 전연지역澶淵之役에서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삼군을 지휘하며 벌줄 때는 벌을 확실히 주고 상줄 때는 확실히 상을 주니 장수와 군사들이 목숨을 바쳤다. 성종을 일컬어 요遼나라의 성주盛主라 일컬으니 황태후의 가르침이 영향이 컸다.”

이보다 더한 상찬 있던가? 황태후는 위대한 군주였다. 

그렇다면 그가 직접 군사를 이끈 전연지역澶淵之役이란 무엇인가?

전연지맹澶淵之盟이라고도 하는 이 전쟁은 서기 1005년, 북송北宋 진종真宗 경덕景德 2년, 요遼 성종聖宗 통화統和 23년, 북송과 거란이 전연澶淵이라고도 하는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복양시濮陽市에 해당하는 전주澶州라는 곳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한 일을 말하는데, 동아시아 세계의 패자를 확정한 유명한 사건이다.

이 조약을 계기로 거란은 동아시아 세계의 절대 패자를 확인하는 한편, 북송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을 감수해야 했다. 
 

이런 양태가 드라마에도 재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전쟁에서 대승한 거란과 대패한 북송은 다음을 골자로 하는 강화조약을 체결한다. 

- 송宋은 매년 비단 20만 필, 은銀 10만 냥과 송나라 여성들을 조공한다.
- 진종은 성종의 모친을 숙모叔母로 부르고, 요는 형이 되며 송은 동생이 되어 형제의 본분을 다하고 요를 사대한다.
- 양국 국경은 현 상태로 하고, 양국 포로와 월경자越境者는 상호 송환한다.

이 조약은 고려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고려는 송을 포기하고, 거란을 주인으로 섬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려가 그렇게 만만한가? 

천만에. 쥐새끼 같아서 교묘한 양다리 전략을 구축하게 된다. 

송나라에서는 문화를 빼먹고, 거란에서는 보호막을 빼먹는다. 
 

비켜 찬 것이 뭔가?

 
물론 이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아 곳곳에서 파열음을 빚게 되니, 저와 같은 일련의 사태 전개 와중에서 터진 것이 바로 거란에 의한 고려 정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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