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윤관 북벌이 미친 지역이 진흥왕 때 순수비가 서 있는 지역 안쪽과 거의 비슷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고려사 윤관 열전에 보면 이를 시사할 만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1. 윤관이 정벌하여 획득한 땅에 대한 설명이 그 열전에 이렇게 나온다.
其地方三百里, 東至于大海, 西北介于盖馬山, 南接于長·定二州, 山川之秀麗, 土地之膏腴, 可以居吾民. 而本勾高麗之所有也, 其古碑遺跡, 尙有存焉, 夫勾高麗失之於前, 今上得之於後, 豈非天歟?
그 땅의 둘레는 300리로 동쪽은 대해大海에 이르렀고 서북의 경계는 개마산盖馬山이며 남쪽으로는 장주長州·정주定州의 2주에 닿았는데, 산천은 수려하고 토지는 기름져서 우리 백성들이 살 만하였다. 본디 고구려 소유로 옛 비석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무릇 고구려가 예전에 잃은 것인데 지금 임금께서 그 후에 얻은 것이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2. 그리고 열전 그 다음 행에,
이에 6성城을 새로 설치하였으니, 첫 번째는 진동군鎭東軍 함주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로, 병민兵民이 1,948정호丁戶이다. 두 번째는 안령군安嶺軍 영주방어사英州防禦使로 병민이 1,238정호이다. 세 번째는 영해군寧海軍 웅주방어사雄州防禦使로 병민이 1,436정호이다. 네 번째는 길주방어사吉州防禦使로 병민이 680정호이다. 다섯 번째로 복주방어사福州防禦使로 병민이 632정호이다. 여섯 번째는 공험진방어사公嶮鎭防禦使로 병민이 532정호이다. 현달하여 어질고 재주가 뛰어나 그 책임을 감당할 만한 인물을 선발하여 그곳을 진무鎭撫하게 하였다.
이렇게 나오는데 이는 새로 쌓은 6성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에 이것은 윤관의 북벌로 얻은 땅에 대한 기술이 맞다.
3.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은,
本勾高麗之所有也, 其古碑遺跡, 尙有存焉
이라는 부분이다. 여기는 원래 고구려 땅이었는데 그 옛비 유적이 아직도 온전히 남아 있다. 그 뜻이다.
4. 여기서 나오는 고비.
내가 보기엔 진흥왕 순수비다. 여기까지 신라가 올라왔었다는 건 이미 고려시대에도 까맣게 잊혀져서 진흥왕 순수비는 고구려비로 인식하고 있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정작 조선후기에는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는 윤관 북벌 때 세운 비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를 놓고 고려시대에는 이를 고구려비, 조선시대에는 이를 윤관 비로 알고 있었다는 것인데, 그만큼 이 지역에 신라비의 출현은 당대에 의외의 발견이었던 셈이다.
5. 결국 윤관의 북벌이 미친 영역은 이 지역 진흥왕 순수비가 서 있는 지역을 넘지 못했던 것으로 남쪽에서 올라갈 때 순수비가 서 있는 지역은 지리적으로나 인종적으로 삼국시대-고려시대까지도 확연한 경계가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 경계가 돌파된 것은 잘 알다시피 조선시대 전기로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한 번 써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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