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 근절을 표방한 대마도 정벌은 이종무를 앞세운 세종 원년, 1419년의 그것을 흔히 기억하지만, 그에 앞서 두 차례 정벌이 더 있었다.
기록상으로 가장 먼저 확인하는 그 시작은 고려 창왕 원년, 1389년 2월 박위朴葳를 앞세운 정벌이며, 2차는 태조 5년, 1396년 12월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을 앞세운 그것이 있다.
2차 정벌 출정을 전하는 태조실록 5년 병자(1396) 12월 3일자 전언이다.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 김사형金士衡으로 오도 병마 도통처치사五道兵馬都統處置使를 삼고,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태학사太學士 남재南在로 도병마사都兵馬使를 삼고,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신극공辛克恭으로 병마사兵馬使를 삼고, 전 도관찰사都觀察使 이무李茂로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삼아, 5도道의 병선兵船을 모아서 일기도一岐島와 대마도對馬島를 치게 하였다. 길을 떠날 때에, 임금이 남대문 밖까지 나가서 이를 전송하고, 사형에게 부월鈇鉞과 교서敎書를 주고 안장 갖춘 말[鞍馬]·모관毛冠·갑옷·궁시弓矢·약상자藥箱子를 내려 주었으며, 재·무·극공에게는 각각 모관·갑옷·궁시를 내려 주었다. 교서는 이러하였다.
○丁亥/以門下右政丞金士衡爲五道兵馬都統處置使, 以藝文春秋館太學士南在爲都兵馬使, 中樞院副使辛克恭爲兵馬使, 前都觀察使李茂爲都體察使, 聚五道兵船, 擊一歧、對馬島。 將行, 上出南門外餞之, 授士衡鈇鉞敎書, 賜鞍馬、毛冠、甲弓矢、藥箱; 賜在、茂、克恭各毛冠、甲弓矢。 敎書曰:
이성계는 출정하는 총사령관 김사형金士衡한테 부월鈇鉞과 함께 교서敎書 주었으니, 교서란 왕을 대신해서 일을 처리하라는 명령 위임서라 개중에 이런 구절이 보인다. 이 대목 기존 번역에 애매한 점이 있어 내가 조금 바꾼다.
모든 장수는 부복俯伏해서 명령을 들을 것이요, 적은 소문만 듣고도 간담肝膽이 떨어질 터이니, 경은 앉아서 계책을 세워서 장수와 군사를 지휘하여 두 번 출병할 일이 없게 하여, 만전萬全을 도모하여 내 생각에 맞게 하라. 혹시나 장수나 군사가 군율軍律을 어기거나, 수령守令들의 태만한 일이 있거든 법대로 징계할 것이며, 크거나 작은 일을 물론하고 즉시 처결處決하라.
庶幾諸將, 俯伏以聽命, 盜賊聞風而破膽。 卿其坐運籌策, 指示將師, 謀無再擧, 以圖萬全, 以副予懷。 其有將師之失律, 守令之稽緩, 法所當懲, 無問大小, 便卽處決。
교서는 페이퍼요, 그에 견주어 부월鈇鉞은 그 페이퍼를 실질로 받침하는 무기다. 그 교서가 위임한 명령을 듣지 않으면 그 부월로 목을 치란 뜻이다. 그 부월이 처결하는 대상은 피아를 구분하지 아니해서 적을 쳐도 되고 깐족대는 아군을 쳐도 된다. 그 처결하는 대상에 예외는 없다.
부월이란 그런 것이다. 저 부월鈇鉞은 도끼다. 장작 패는 도끼 그것이다. 부월鈇鉞은鈇와 鉞 합성어로 둘 다 도끼라는 뜻이라, 두 말 모두 쇠를 의미하는 金이 뜻을 한정하는 부수자로 쓰였으니, 거무틱틱한 색채가 완연하다.
더러 발음은 같은 斧鉞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부수자가 맞지 않아 멋이 없다. 자고로 도끼라면 鈇鉞이 좋다.
그렇다면 저런 부월은 그런 임무가 끝나고 나서는 어찌했을까? 시간을 좀 거슬러 저 유명한 윤관과 오위총에 의한 여진 정벌을 본다. 고려사 세가 권제 12 예종睿宗 3년, 1108년 4월 기축일에 윤관은 복귀하고는 왕을 조알한다.
윤관尹瓘과 오연총吳延寵이 전투에서 이기고 돌아왔다. 왕이 고취鼓吹와 군위軍衛를 갖추어 그들을 맞이하도록 명령하였다. 대방후帶方侯 왕보王俌와 제안후齊安侯 왕서王偦를 보내 동교東郊에서 위로연을 베풀었다. 윤관과 오연총이 경령전景靈殿에 이르러 복명復命하고 부월鈇鉞을 반환하여 바치자, 왕이 문덕전文德殿에 나아가 윤관과 오연총, 여러 재추宰樞를 불러 전각 위로 오르게 하고 친히 변방의 일을 물었는데, 밤이 되어서야 끝났다.
己丑 尹瓘·吳延寵凱還. 王命具鼓吹軍衛以迎之. 遣帶方侯俌·齊安侯偦, 勞宴於東郊. 瓘·延寵詣景靈殿復命, 還納鈇鉞, 王御文德殿, 引瓘·延寵及諸宰樞上殿, 親問邊事, 入夜乃罷.
이에서 보듯이 부월은 줬다가 도로 반납한다. 그렇다면 부월은 마냥 쓰는가?
그것도 제한이 있어 장수가 국경을 벗어날 때만 썼다. 이성계가 대마도 일기도로 가는 김사형한테, 예종이 여진 땅으로 들어가는 윤관한테 부월을 준 까닭이 이에서 비롯한다.
그렇다면 왜 국경이 기준인가? 그곳은 왕화王化가 미치지 않는 구역인 까닭이다. 나아가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그런 남의 땅에 들어간 장수를 본국에서 통제하게 되면 첫째 명령이 오가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소비되고, 둘째 무엇보다 본국에서는 현지 사정에 어두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부월은 국경을 벗어난 장수가 현지 사정을 보고 판단해서 즉결하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왕을 대신하는 징표인 까닭에 전권을 틀어쥔다. 이 전권에서는 인사권까지 포함한다. 이 인사권이 무섭다.
문제는 인사권이다. 이 인사권은 아무리 총사령관이 전권을 쥐었다 해도 실행하기가 몹시도 어렵다. 자칫 왕에 대한 권위를 배신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인사권은 좀처럼 행사하지 않는다.
돌아와서 부월을 반납하면서 논공행상을 하는 과정에서 이런 사람은 공이 아주 크므로 특진을 해야 한다 해서 시켜주는 그런 시스템이 보통이다.
하지만 김유신은 예외였다. 그는 인사권까지 직권으로 행사했다.
문무왕文武王 원년, 661년, 당군 소정방蘇定方이 평양성을 포위하자 당군을 지원하는 총사령관으로 출전한 그는 보기감步騎監 열기裂起와 군사軍師 구근仇近을 필두로 하는 열다섯명으로 뽑아 구성한 특공대를 당군 진영에 먼저 파견하게 되는데, 이들이 이 일을 용감무쌍하게 해내자 그 자리서 열기를 급찬級飡으로 특진케 한다.
돌아와 문무왕을 배알하면서 부월을 반납하는 자리에서 김유신은 열기를 사찬沙飡으로 한 등급 더 올려달라 요구해 관철한다. 특공대 활동 한번 잘 해서 벼락 출세를 거듭한 것이다.
국경을 벗어난 장수는 임금의 명령도 듣지 않아도 된다며 그 징표로 준 부월은 그만큼 상징만큼이나 실질로도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그런 도끼가 국민국가가 개막하면서 슬그머니 칼에다가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칼 역시 검劍·경鏡·인印이라 해서 삼보三寶 중 으뜸으로 취급되긴 했지만, 그래도 왕권의 상징은 누가 뭐라 해도 도끼가 첫번째였다.
칼이 부월을 대체한 이면에는 도교 신학의 침투가 있다. 검경인은 도교의 삼보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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