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양상을 보면 충주 누암리 고분군은 그 분포양상과 사적 지정 구역이 따로 논다는 사실을 단박에 안다. 아마도 현실적인 이유가 컸으리라 짐작하거니와, 무덤이 분포하는 양상을 보면 그 밀집도가 가장 높은 코어 구역을 중심으로 사적이 지정됐음을 안다.
그렇다면 누암리 고분군이 위치하는 데를 위성에서 조망하면 어떤가? 이 작업은 왜 이 무덤이 이곳에 있는지를 받침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참말로 편안한 시대를 산다.
저 공동묘지가 만들어질 6세기 중후반 무렵과 지금은 여러 지형이 바뀌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만, 남한강 물줄기가 중국 황하의 그것만큼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임은 불문해도 가지하니, 무엇보다 저 일대에 포진하는 산들 양상을 보면 지금과 같은 강줄기가 형성됐을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겠다.
물론 그 충적지대를 중심으로 강폭이 드나듦이 있었을 것이다.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저 위성지도를 보면 지금의 충주 시내 중심가를 형성하는 구역과 신라시대 중원경의 중심구역이 달랐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누암리 고분군 분포양상이라든가 그 규모 등등을 판단하건데 이곳이 중원경 일대를 지배한 이 지역 지방권력의 최상층이 묻힌 곳임은 확실한 이상
지금의 충주시내가 중원경 중심구역이라면 사람이 죽어 일일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시체들을 실어날랐을 것이지만, 그 시대에 그런 일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불편을 감수할 만한 모험은 안 한다.
그렇다면 중원경 중심구역, 그러니깐 조선시대로 치자면 읍성이 있을 곳은 어디인가? 강을 건너지 않는 인접 지점을 찾아야 한다.
그곳이 어딘가? 볼짝없이 저 지도에서 붉은색으로 표시한 지역이다.
그 유명한 중앙탑이 있는 그 지점이 바로 중원경이다.
아마 저 일대에서 중원경 흔적이라고 볼 만한 고고학 발굴성과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도 오래 되어놔서 내가 그 현장이 어디인지 기억하지를 못하지만, 그 발굴현장을 두어 번 내가 직접 둘러보기도 했으니, 그때가 김성범 중원연구소장 시절인가 하니, 참 오래됐나 보다.
암튼 누암리고분군은 지금의 사적 지정구역보다 훨씬 넓고, 나아가 현재까지 200기 정도가 파악됐다지만 개소리라, 수천 기에 달했을 것이며, 견주건대 이곳은 국가시설로 친다면 동작동 국립묘지 같은 곳이요, 용미리공동묘지 같은 곳이라 하겠다.
저 지역이 공동묘지로 채택된 까닭이야 우리가 그네들 속내를 알 수는 없지만, 주변 일대를 둘러봐도 저만한 곳을 찾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덧붙여 저 공동묘지가 과연 어떤 식으로 분배가 되었을지는 짐작할 만한 기록이 없으니 자세히 알 수는 없다.
다만, 특정한 구간을 나누어 품빠이가 이뤄졌을 것이니, 예컨대 가 구역은 우륵 집안, 나 구역은 강수 집안 거 이런 식으로 분배가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또 하나 누암리고분군을 생각할 때 내가 보기에 중요한 지점은 이 지역이 신라에 편입되면서 그 직후 대략 반세기 내지는 1세기간 집중적으로 조성된 신라무덤이라는 사실이다.
앞으로 발굴 성과에 따라 얼마든 예외하는 결과가 나올 수는 있지만 단 하나 분명한 점은 누암리고분군은 완전한 신라공동묘지이며 그 밀집도는 상당히 높지만 잠깐 경영하다가 무덤 포화상태로 '만들어지는 공동묘지'에서 성장이 금새 끝나고 '관리되고 추념되는 공동묘지'로 변해갔다는 사실이다.
이런 양상은 신라 왕국 전체에 걸쳐 공통으로 관찰되는 양상이라는 점에 심대한 의미가 있다.
내가 누누이 다른 데서 지적했듯이 신라 공동묘지는 7세기에 접어들면서 저와 같은 대규모 공동묘지 시대가 끝난다. 그것이 끝나는 이유는 더는 무덤 쓸 땅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다 그렇다. 다른 지역 사례를 봐도 신라 무덤은 7세기를 고비로 수천기에 달하는 공동묘지 시대가 급작스럽게 소멸한다.
나는 이 현상 뒤에 국가 중앙권력의 개입이 있었다고 본다. 간단히 말해 더는 지금과 같은 식으로 무덤을 만들지 마라! 이러다 좃댄다. 전 국토가 묘지로 변하니 더는 이 짓거리 하지 말라! 이젠 화장해라!! 이런 식으로 명령이 하달됐다고 본다.
그러지 않고서는 대규모 공동묘지가 급작스레 7세기를 고비로 종적으로 감추는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다.
중원경은 아주 재밌는 점이 그것이 백제 고구려 신라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다는 사실이다. 백제 무덤과 고구려 무덤, 그리고 신라무덤이 신통방통하게도 다르다.
중원경의 경우 이 양상이 어찌 나타나는지는 내가 추후 조사를 해봐야겠지만, 이걸 어찌 설명할까 나 역시 고민 좀 해 보는데, 신라의 경우 희한하게도 백제나 가야 혹은 고구려서 쟁취한 지역의 경우 후대의 읍성에 해당하는 중심 구역과 그 외곽 공동묘지가 기존 왕국들의 그것과 달라진다.
이를 민감하게 보여주는 데로 경남 함안을 들거니와, 이 함안은 아다시피 아라가야 중심지라, 이곳을 신라가 역시 진흥왕 무렵인가에 점령하고는 중심지를 바꿔 버린다.
말이산고분군과 그 주변이 아라가야 수도 중심구역이라면, 신라는 그 지역을 점령하면서 그 중심지를 바꿔 버린다.
신도시를 만들어 인근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데 그 경계선이 성산산성이다.
이 성산산성을 관문으로 삼아 기존 아라가야 중심구역과 신라가 새롭게 만든 신도시가 갈라진다.
중원경과 누암리고분군도 이 점에서 한 치 예외가 아닌 듯하다.
덧붙이건대 한국고고학은 이런 점들을 궁구해야지 언제까지나 토기 붙잡고 양식이 뭐네, 무덤을 만든 방식이 뭐네 하는 짓 좀 이제는 그만했음 싶다.
#공동묘지의퇴출 #공동묘지퇴출 #공동묘지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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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누암리 고분군, 우륵~강수 시대 신라 중원경을 주름 잡은 사람들의 저승 종족 공동 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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