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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단재가 오도한 역사, 사대주의자 김춘추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9.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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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애국주의적 언론인의 대표주자 중 한 명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1908년 《독사신론讀史新論》 한 대목에서 이리 썼다. 

그러나 "신라가 國小民弱(국소민약)하니 무엇으로 백제의 앙을 갚으랴. 오직 外援(외원)을 빌 뿐이다" 김춘추가 기둥 친 끝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고구려로 들어갔다…(중략)…그래서 김춘추가 바다를 건너 당에 들어가, 당태종을 보고 신라의 위급한 정형을 진숧고. 힘 닿는데까지 限하여 모든 卑辭厚禮(비사후례)를 가져 원병을 구할 새, 당조(唐朝) 군신의 뜻을 맞추기 위하여 子 법민·인문 등을 당에 留質(류질)하며, 본국의 의관을 버리고 당의 의관을 쓰며, 진흥왕 이래로 自記(자기)한 본국의 제왕년호를 버리고 당의 년호를 쓰며, 또 당 태종이 편찬한 《진서晉書》와 그 刪增(산증)한 《사기史記》·《한서漢書》 《삼국지三國志》 등- 그 중의 조선에 모멸한 말이 많은 문자를 가져다가 그대로 본국에 유전하여, 사대주의의 병균을 전파하기 시작하니라. 

신채호


이런 역사 독법을 단재는 독사신론의 한 예로 들었다. 독사신론讀史新論이란 무엇인가? 역사[史]를 읽는[讀] 새로운[新] 논법[論]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저 김춘추와 그의 소위 대당(對唐)외교에 대한 김춘추의 독법은 종래의 역사 독법과 무엇이 다른가? 

단칼로 쳐서 말한다. 

내셔널리즘nationalism이다. 민족주의다. 

단재가 새로운 오직 한가지는 민족nation이 있을 뿐이다. 

단재 이전에는 민족이 없다. 조선시대에 무슨 민족이 있고, 무슨 민족주의가 있다는 말인가? 없던 민족이 느닷없이 단재가 태어나고 성장하기 시작한 19세기 중후반기에 출현해 지식인 사회 일부를 중심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없던 민족과 민족주의가 출현하고 나니, 그것이 없던 그 이전 시대 역사 역시 이 민족과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 역사를 재단하기에 이르렀다. 

민족주의로 철두철미 무장한 단재한테 김춘추는 민족과 민족주의를 배반한 "사대주의자"일 뿐이었다. 그가 저에서 말하는 사대주의라는 말 자체가 민족 혹은 민족주의라는 말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대칭이라는 점에서 그의 새로운 역사읽기가 실은 아주 단순해 민족주의 주입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단재의 독법은 정당한가?

전연 타당하지 않다. 

그의 역사독법은 언어도단이다. 민족과 민족주의가 없던 시대에 그것을 끌어다 들여, 그것으로써 재단했으니, 이것이 역사오도 아니고 무엇이랴? 

물론 그가 저리할 수밖에 없던 필연성과도 같은 곡절 혹은 사연도 있다. 민족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다고 진단한 그에게 그런 민족이 그런 위기에 처한 위기를 궁구할 필연이 있었으며, 그 필연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민족 혹은 민족주의가 없던 시대에서 그 병균을 찾아 나섰고, 그리하여 이윽고 그 원흉으로 김춘추와 김유신을 지목한 것이다. 

민족주의는 언제나 배타적이며 언제나 폭력적이다. 

그 배타와 폭력은 언제나 저항을 수반하며, 그 저항의 논리적 근거와 타당을 제공하는 밑거름이다. 그 폭력과 배타를 그는 외세 침략에 대한 무기로 장착하고자 했다. 그것을 총칼로 삼아 그런 민족과 민족주의를 더럽히는 해악을 일소하고자 했다. 

문제는 지금이다. 

단재로부터 100년이 더 흐른 지금도 저와 같은 사대주의 운운하는 논리가 뿌리깊이 박혀 신라라면, 김춘추라면, 김유신이라면 느닷없이 외세인 당을 끌어들여 한민족을 말살하고 분단한 책임을 묻는다는 사실이다. 그에 반발하여 남북국시대를 개발하는가 싶더니, 발해를 신라의 대향마로 내세운다. 

민족사가 아니라 세계사를 해야 하는 소이는 이에서도 정당성을 찾는다. 민족 앞에 인간이 짓눌린다. 

단재의 독법은 버려야 한다. 어처구니 없는 오독에 기반한 그 독법을 더는 묵수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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