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참에 반드시 백제는 인류 역사에서 종적을 말살하고 말리라고 결심은 굳힌 신라는 5만이라는 대군을 동원해 사비성을 향해 나아갔지만, 황산벌에서 계백에 이끄는 5천 군대에 발목이 잡혔다.
네 번 싸워 네 번을 진 신라군 수뇌부에서는 특단의 대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으니, 분기탱천을 유발하는 전술을 강구했다.
이에서 66세에 이른 노회한 총사령관 김유신이 택한 방법은 그 분기탱천이 최대한 ‘약발’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아주 괜찮은 놈을 희생시킨다는 것이었다.
아마 이 전쟁에 그의 아들들은 참전하지 못한 듯하다. 나는 이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때까지 성년에 이른 그의 유일한 아들은 삼광三光이었다.
하지만 삼광은 이 무렵 당군에 가담해 그들을 안내하는 역할을 한 듯하다.
황산벌 전투에서 위기를 타개하고자 왜 김유신이 자기 자식 대신 조카를 택했야만 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없었다.
한데 그냥 조카라고 하면, 약발이 떨어진다. 그 조카는 다름 아닌 자신의 사위이기도 했다.
김흠순. 유신의 5살 아래 동생인 그 역시 신라군 수뇌부 핵심 중의 핵심이었다. 총사령관 형 밑에서 부사령관 중 한 명이었다.
그에게는 반굴盤屈이라는 아들이 있었으며, 이번 백제 정벌 전쟁에는 아마도 중대장급 정도였을 영관급 장교로 참전했다.
삼국사기 김영윤 열전에는 아버지 김흠순이 반굴을 택한 것으로 처리했지만, 이는 수뇌부 결정이었다. 김유신의 최종 재가를 거쳤으니, 말할 것도 없이 이는 김유신의 생각이었다.
관창에 앞서 왜 반굴이 나서야만 했는지 우리는 묻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왜 하고 많은 군인 중에 반굴이 첫 번째 주자로 나서 혼자 적진에 뛰어들어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해야 했는지 의문을 풀 수가 없었다.
그는 5만 신라군이 보는 앞에서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를 본 신라군에서는 “이런 x발...”이라는 구호가 난무했다.
화랑세기 19세 풍월주 흠순공欽純公 전에 보이는 한 대목이다.
“공의 셋째 아들만이 홀로 (염장공의 딸들을) 버리고 유신공의 딸 영광令光을 아내로 맞아 아들 영윤令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반굴공盤屈公이다. 부자가 결국 전쟁에서 죽었으니 아름다운 이름이 백세에 남으리라.”
이것이다.
우리가 황산벌 전투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바로 이것이다.
5만 신라군 중 반굴은 김유신에게 가장 가까운 피붙이였다.
조카이자 사위를 희생시킴으로써 그는 5만 신라군을 향해 "너희들은?"이라고 물었던 것이다.
김반굴은 김흠순의 아들로 희생된 것이 아니라 김유신의 사위로 희생되었다.
(2016.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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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과부로 만든 김유신(1) 풍월주 김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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