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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딸을 과부로 만든 김유신(3) 원술이 희생되지 않은 이유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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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성공원 김유신 동상

 
김유신 장자는 김삼광金三光이다. 그가 군직에 있었으면 당연히 그는 아버지를 따라 백제정벌전에 종군했어야 했지만, 이미 660년 이 전쟁 당시 김유신은 66세 노장이었고, 그 아들 삼광은 몇 살이었는지 확실치는 아니하나, 적어도 40대 중년이었을 것이다. 

또 군대 쪽에서 활동한 흔적은 없고, 저 전쟁보다 6년이 지난 문무왕 6년(666)에는 천존의 아들 한림漢林과 더불어 나마로서,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한 상태였다고 하므로, 금수저로 일찍이 관직에 진출해 차곡차곡 공무원 경력을 쌓은 듯하다. 

그는 분명 백제 정벌전에는 출전하지 않았다. 앞서 얘기했듯이 했다면 그가 가장 먼저 희생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유신은 곤혹에 처한 전세를 만회하고자 약발이 센 젊은 친구들만 골랐다. 그래서 부사령관들 자제를 골랐으니 가장 먼저 자기 동생 김흠순의 아들 반굴을 골랐다. 

예서 이런 의문이 들 만하다. 김유신은 기록에 보면 다른 아들도 많은데 그들은 어찌되었는가 하고 말이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의하면, 김유신은 정실 부인과의 사이에 총 5남 4녀를 두었다. 네 딸은 실명이 공개되지 않고 그 행적도 묘연하지만, 아들들은 모조리 실명 공개된다.

장자 삼광을 필두로 원술·원정·장이·원망이 그들이라 이들은 모조리 대아찬 이상 재상을 역임했다. 역시 금수저 집안이라 다르다. 

예서 문제는 삼광이야 사정이 있어 참전 못했다 치고 왜 다른 네 아들 원술·원정·장이·원망은 출전하지 않았느냐 하는 의문이다.

이들이 출전하지 않았다는 직접 증거는 없지만, 앞서 보았듯이 출전했다면 가장 먼저 희생되어야 했기에 참전 안 한 것이 확실하다. 

왜 그랬을까? 다들 너무 어리거나 태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김유신은 삼국사기 신라 태종무열왕 본기에 혼인 기사가 있는데, 655년에 김춘추 딸인 지소 공주랑 결혼했다. 나아가 같은 사기 열전에는 둘 사이에는 삼광을 필두로 원술·원정·장이·원망이 모두 지소 소생이라 했다. 

하지만 이는 내가 이미 구명했듯이 삼광은 절대로 지소 소생일 수가 없다. 나이가 도대체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와 화랑세기에 보이는 김유신 계보와 그의 자식들. 미세한 차이가 관찰된다. 어느 쪽이 사실에 가까운가? 말할 것도 없이 화랑세기다.

 
무엇보다 김유신의 655년 결혼 기록이 초혼이라 볼 수는 없다. 이때 이미 김유신은 환갑이었다. 환갑까지 홀아비로 지냈다는 말인가?

이는 나아가 그 큰아들 김삼광 행적을 볼 적에 이미 그 이전에 결혼했다. 이전 결혼에서 낳은 아들이 삼광이다. 

아들들 중 원술 이하 넷이 지소 소생이다. 따라서 저들은 655년 이후에 출생해야 한다.

660년 백제 정벌전 당시 저들은 아주 꼬맹이였거나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래서 출전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희생될 수가 없었다. 

이런 의문들이 화랑세기를 통해 명쾌히 풀린다. 

김유신한테는 령모令毛라는 조강지처가 따로 있었고 그와는 612년, 김유신 나이 18세 때 혼인했다. 삼국사기엔 김유신한테 딸 넷이 있었다고 하거니와 화랑세기엔 그 넷의 실명을 공개한다.

진광·신광·작광·영광이 그들이라, 남자 형제인 삼광과 마찬가지로 모두 빛 광光자를 돌림자로 썼다.

이들 광자 돌림 자식들이 영모 소생이다. 그 네 딸 중 한 명인 영광이 바로 자신의 조카이자 동생 김흠순의 아들인 반굴과 혼인해서 아들 김영윤을 둔다. 사촌간 근친혼이다.

이 반굴이 황산벌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했고 그 아들 영윤 또한 훗날 나당전쟁 중인가에서 역시 같은 길을 걸었다.

김유신 첫 부인 영모는 김유신보다, 아마도 655년 김유신이 재혼하기 전에 죽은 듯하다. 

김유신 집안은 또 하나 특징이 대체로 장수했다. 김흠순은 김유신보다 몇 살을 더 살고 80대에 죽었고, 아들들로 다 대아찬 이상 재상을 역임하는 것으로 보아 최소 60대 이상은 산 듯하다. 대표적인 장수집안인 셈이다. 

아무튼 우리는 김유신 아들 중 왜 원술이 저 백제 정벌전쟁에서 희생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을 그의 혼인 관계를 파악함으로써 명쾌히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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