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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바닥부터 재상으로 수직 상승한 왕자지王字之

by taeshik.kim 2024.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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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지는 종묘에 신주까지 봉안되었다가 쫓겨났다. 왜?

 
이름 듣고는 대뜸 대물열전 등판 인물 아닌가 하겠지만, 또 그 후속타를 기대한 사람들한테는 미안하지만 아니다. 

고려 중기 때 인물이다. 그는 이미 궁예 정권 시절 경사經史에 통달했다 해서 출사해 원외랑員外郞을 거쳐 동궁기실東宮記室까지 이르렀지만 궁예가 포악하게 변하자 머리 깎고 중이 되었다가 훗날 세상이 격변하고 왕건이 쿠데타로 고려를 건국하자 다시 나와 국가 기밀을 관장하게 된 박유朴儒라는 사람 현손이다. 

박씨 집안 직계 후손임에도 왕씨 성을 쓴 까닭은 이미 저 박유가 하도 고려 왕조가 자리 잡는 데 공이 크다 해서 그 할아버지 박유한테 아예 왕실 성인 왕씨를 하사해 왕유王儒로 창씨개명한 데 따른다. 

고려사 왕유 열전에 부기된 왕자지王字之 열전에 의하면 그는 자字가 원장元長이고, 어릴 적 이름은 소중紹中이었다.

우리가 유의할 점은 개국 공신에 속하는 자손으로서 왕씨 성을 하사받은 거물 후손이지만, 그 후손은 비실비실해서 왕자지 시대에는 겨우 서리胥吏를 전전할 뿐이었다.

왕자지 역시 특기할 점이 바로 이 서리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요즘으로 치면 주사 혹은 주무관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런 그가  누이 남편 왕국모王國髦가 당시 권신 이자의李資義를 주살할 적에 궁문을 지킨 공로로 도교령都校令으로 승진하더니 숙종肅宗 시절엔 내시內侍가 되어 왕을 근거리에서 보좌하다가 왕실 사무를 관장하는 부서장인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된다.

이어 예종 시절에는 병마판관兵馬判官이 되어 윤관尹瓘을 따라 여진을 정벌하고 그 공으로 전중소감殿中少監으로 승진한 데 이어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이병부상서吏兵部尙書·추밀원사樞密院使와 같은 재상급 고관 대작을 지내다가 예종 17년(1122) 참지정사叅知政事로 죽으니, 향년 57세였다.

이로 보아 그는 정말 맨땅에서 맨주먹으로 출발해 재상까지 승진했다.

그의 주특기는 궁궐 호위 혹은 왕실 사무였다. 이런 특장을 살려 나중에 지금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부서까지 장악한다. 

그는 문관보다는 무관에 가깝다. 이런 인물이 예종 묘정에 배향까지 되었다가 훗날 간관諫官들이 들고 일어나 반대해 기어이 종묘에서 쫓겨난 것은 그가 문관이 아닌 무관 출신이었기 때문으로 보는 편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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