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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철의 잡동산이雜同散異

무슨 풀을 심으라는 규정이 없는 묘소, 건원릉이 억새 천지가 된 내력은?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2.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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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원릉 억새


《현종개수실록》 4년 3월 18일 기사에

병조 판서 김좌명이 영릉(英陵)의 사초를 개사改莎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문제로 상차하기를,

"신이 듣건대, 본조의 여러 능침陵寢 가운데 유독 건원릉健元陵과 영릉英陵에 사용한 사초가 보통과 달랐는데 그 때문에 처음 봉분하였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개사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신이 경기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영릉을 봉심하였는데 능위의 사초가 이삭이 나오고 꽃이 활짝 피어 보통 사초와 같지 않았으며 큰 것은 3척 가까이 되었으니 속칭 속사초束莎草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조 때에 개사하려고 했었는데, 백년토록 개사하지 않은 사초를 일시적인 소견으로 갑자기 개사하는 것이 중대하고도 어려운 문제라고 여겨 그대로 놔두고 개사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개사를 하려 하니 신의 마음에 석연치 못한 점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라는 명을 내리고 다시 봉심하게 하였다. 그후에 마침내 개사하였다.

라는 구절이 있다. 태조의 건원릉과 세종의 영릉은 잔디가 달랐다는 것이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건원릉은 청완靑薍, 즉 억새가 덮였고, 이 기록에 따르면 영릉은 원래 속사초束莎草가 뒤덮였다고 했다. 속사초는 내용으로 보면 흔히 삐비라고 하는 띠가 뒤덮혔던 듯하다.

묘소 관리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억새와 띠가 묘소에 자라기 시작하면 모조리 파내고 새로 잔디를 심지 않는 한 이길 수 없는 풀이다. 건원릉과 영릉은 이런 이유로 억새와 띠가 덮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종 때 영릉은 이를 모두 걷어내고 잔디를 심었으므로 오늘날과 같은 릉으로 유지가 되었으리라.


*** 편집자注 ***

건원릉 억새 왁싱


건원릉은 지금의 구리 동구릉 태조 이성계가 묻힌 곳이며, 영릉英陵은 지금의 여주 세종대왕릉이다. 영릉은 애초 서울 서초에 있었다가 개장해서 저리로 갔다.

저 일을 논의한 때가 현종 4년이라 했으니, 1663년이라, 개사改莎라 함은 잔디를 바꿔 심는 것으로 간단히 말해 무덤을 재단장하는 일이다.

이로 보건대 저 무렵에 다른 왕릉은 모두 우리가 아는 그 잔디를 심었지만, 건원릉과 영릉만큼은 그것과는 달라서 전자는 억새가 자랐고, 영릉은 속사초束莎草로 덮였음을 본다. 속사초는 그 정체가 조금 아리숑숑하지만, 묶음 혹은 다발로 자라는 잔디라는 뜻이니, 장성 독거 말처럼 삐비라고 하는 띠로 보인다.

우리는 묘소에 잔디를 심는다고 알고 지금도 그렇지만, 이게 실은 골을 좀 때려서 무덤에다가 어떤 풀을 심어야 하는지 그 어떠한 규정이 예서禮書에는 없어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중국을 보면 지금 기준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아는 잔디를 심은 데가 없다. 이는 저에서 말미암는다.

다만, 무덤 주변에다가 소나무와 잣나무 혹은 측백을 심는다는 규정 혹은 증언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중국의 황제릉 같은 데를 가 보면 측백이 그리 많다. 소나무 잣나무라 하지만, 중국은 곳에 따라 다르겠지만 소나무가 자라는 환경이 아니다.

저를 보면 저때 건원릉과 영릉 또한 모조리 잔디로 바꿔 심은 듯하지만, 어이한 셈인지 현재에 이른다.

 

여주 영릉. 잔디로 확 개비했다.


잔디 잔디 하지만 이 잔디는 개보수가 지랄 같아서 다른 잡초가 걸핏하면 자라나는 데다 나무가 나면 그 아래 잔디는 다 죽어버린다. 물론 장성 땅 또 다른 내 지인 잔디업자 羅모는 다른 말을 하겠지만 잔디 장사를 믿어서는 안 된다.

건원릉 억새가 이성계 유언에 말미암았다는 전설 혹은 주장 혹은 증언은 다 개소리임은 아래에서 내가 지적했으니 같이 읽어주면 좋겠다.


견강부회한 건원릉 함흥 억새설

 

견강부회한 건원릉 함흥 억새설

동구릉은 서오릉과 더불어 조선왕릉 대표 공동묘지라, 구리 동구릉은 무엇보다 그 창건주 이성계가 묻힌 곳이라 해서 조선왕가 공동묘지 중에서도 언제나 으뜸이었으니, 왕릉은 이름이 각기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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