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문사인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문집인 《가정집(稼亭集)》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나왔으며, 어떻게 보완 유전되게 되었는지는 현전하는 이 문집에 붙은 네 시기 발(跋)을 보면 여실하다. 아래는 그 시기별 발문이다.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7에 의한다.
1. 초간본(初刊本)
가정 이중보는 나와 똑같이 익재(益齋) 문하 출신이요, 또 한원(翰苑)에서 함께 노닐었던 인연도 있다. 무릇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그에게 물으면서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우러렀는데, 허망하게도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아, 애석한 일이다. 지금 그의 아들인 밀직 제학(密直提學) 이색(李穡)이 신축년(1361, 공민왕10) 파천(播遷)하는 창황(蒼黃)한 때를 당해서도 유고(遺稿)를 잃지 않고 20권으로 엮은 다음에 매부인 금주(錦州)의 수재(守宰) 박상충(朴尙衷)으로 하여금 이를 정서하여 판각하게 하였다. 내가 이를 얻어서 열람하고는 개연한 심정이 들어서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보았는데, 그럴수록 그가 이와 같이 수립한 것에 대해서 더욱 탄복하게 되는 동시에 그의 아들이 또 이와 같이 한 것이 가상하게 여겨지기에 이렇게 쓰게 되었다. 지정(至正) 갑진년(1364, 공민왕13) 5월 1일에 율정노인(栗亭老人) 윤택(尹澤)은 삼가 적다.
稼亭集後識[尹澤]
稼亭李中父與予俱出益齋門下。又同游翰苑。凡所質疑。山斗是仰。奄然先逝。嗚呼惜哉。今其子密直提學李穡。於辛丑播遷蒼黃之際。能不失遺藳。編爲二十卷。令妹夫錦州宰朴尙衷書以壽諸梓。予得而閱之。慨然圭復。益歎其所樹立如此。又嘉其有子如此。於是乎書。至正甲辰五月初吉。栗亭老人尹澤。謹識。
발(跋) : 총 4편의 발문이 실렸다. 원문에는 구분이 없으나 내용을 참고하여 차례로 제목을 달아 주었다.
[주-D001] 신축년……때 : 1361년(공민왕10)에 홍건적 10만 명이 침입하여 개경(開京)을 함락시키자 12월에 왕이 복주(福州) 즉 지금의 안동(安東)으로 피난한 것을 말한다.
중간본(重刊本)
우리나라의 문학 하는 선비 중에는 중국의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많다. 그러나 부자가 서로 잇따라 고과(高科)에 발탁되고 사한(史翰)에 오름으로써 이름이 중국에 알려지고 세상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을 일컫는 경우는 오직 가정과 목은 두 선생뿐이라고 하겠다. 임인년(1422, 세종4)에 내가 명을 받고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을 적에 총제(摠制) 이종선(李種善)과 동지총제(同知摠制) 이숙묘(李叔畝)가 가정의 문집을 나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우리 할아버지의 문집을 금산(錦山)에서 판각하였는데 불행히도 병화(兵禍)를 입고 말았으니, 바라건대 그대가 중간(重刊)하여 영원히 전하게 해 주었으면 한다.” 하였다. 나는 가정 선생에 대해서 조부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기꺼이 공장(工匠)에게 간행하도록 명하여 길이 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연침(淵沈)의 학문은 채서산(蔡西山)에게서 나왔고, 식철(軾轍)의 문장은 소노천(蘇老泉)에게서 근원하였다고 여겨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목은의 아름다운 도덕과 문장도 실로 가정에게서 나온 것으로서, 그 교화를 받은 유래가 깊다고 할 것인데, 이러한 사실을 그 누가 알겠는가. 내가 뒤늦게 태어난 관계로 한가히 거하실 적에 옆에서 모시며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무지몽매함을 깨뜨릴 수가 없었으니, 슬픈 일이다. 영락(永樂) 임인년(1422, 세종4) 10월 모일에 가선대부(嘉善大夫) 강원도 도관찰출척사(江原道都觀察黜陟使) 문성(文城) 유사눌(柳思訥)은 삼가 발문을 쓰다.
稼亭集跋[柳思訥]
吾東方文學之士。登中朝科者多矣。然父子相繼擢高科登史翰。名聞中夏。世稱其美。惟稼亭與牧隱兩先生而已。歲在壬寅。余受命爲江原都觀察使。揔制李種善,同知揔制李叔畒廼以稼亭文集授余曰。我 祖文集刊板在錦山。不幸罹于兵燹。將子重刊以示不朽。余於 稼亭先生。視猶祖父也。故樂爲之命工鋟榟。以壽其傳。余惟淵沉之學出於蔡西山。軾轍之文原於蘇老泉。誰知 牧隱道德文章之美實由於 稼亭。而化之所從來者遠矣。吾生晚也。未得侍閒居而目接耳受。以破矇聾。悲夫。永樂壬寅十月 日。嘉善大夫江原道都觀察黜陟使文城柳思訥。敬跋。
[주-D001] 이종선(李種善) : 목은(牧隱)의 셋째 아들이다.
[주-D002] 이숙묘(李叔畝) : 목은의 둘째 아들인 이종학(李種學)의 넷째 아들이다.
[주-D003] 연침(淵沈)의……여겨진다 : 연침은 채연(蔡淵)과 채침(蔡沈)으로, 서산선생(西山先生)으로 일컬어진 채원정(蔡元定)의 아들이다. 채원정이 주희(朱熹)에게 배우려고 찾아갔을 때, 주희가 그의 학문 수준을 알아보고는 크게 놀라면서 노우(老友)로 대우하며 함께 강론한 고사가 유명하다. 채연은 절재선생(節齋先生)이라고 일컬어졌는데, 《역상의언(易象意言)》과 《주역괘효경전훈해(周易卦爻經傳訓解)》를 저술하였다. 동생 채침은 구봉선생(九峯先生)이라고 일컬어졌는데, 스승인 주희의 부탁을 받고 침잠한 지 10여 년 만에 《서경집전(書經集傳)》을 완성하였다. 식철(軾轍)은 소식(蘇軾)과 소철(蘇轍)로, 노천(老泉)이라고 자호한 소순(蘇洵)의 아들인데, 세 사람 모두 당송 팔대가로서, 부자가 삼소(三蘇)로 일컬어진다.
삼간본(三刊本)
우리 선조인 가정 문효공(文孝公)과 목은 문정공(文靖公) 두 분 선생은 부자가 서로 이어 고려와 원나라에서 명성을 드날렸다. 두 분의 도덕과 공업이 사책(史冊)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가운데, 여사(餘事)로 지은 문장들도 고금에 유례가 없을 만큼 빼어났으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태산북두처럼 추앙하였다. 그래서 향기 넘치는 그 유편(遺編)들을 온 나라 사람들이 거의 집마다 소장함은 물론이요, 등단하여 문장을 주관하는 자들의 지남(指南)이 되어 왔다. 그러다가 임진년(1592, 선조25)에 이르러 병화를 입은 나머지 판본까지 모두 잃게 되었다. 후세 사람을 길이 감화시킬 영화(英華)와 백대토록 귀감이 될 사적을 찾아본다면 오직 이 유편 속에서 방불하게나마 상상할 수가 있었는데, 이제 장차 사라져서 전해지지 않을 위기에 처했으니 이는 우리 문중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사문(斯文)을 위해서도 애석한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에 우리 종인(宗人)인 승지 이덕수(李德洙) 보(甫)가 지난번 승평(昇平 순천(順天) )의 수재로 있을 적에 목은의 문집을 구해서 얻게 되자, 이를 먼저 판각하여 간행한 다음에 한산(韓山)의 문헌서원(文獻書院)에 보관함으로써 길이 전할 수 있게 하였다. 그 뒤에 내가 영남(嶺南)의 방백으로 가게 되었을 때, 종장(宗丈)인 판부(判府) 이덕형(李德泂) 상공(相公)이 가정의 문집 1편을 수중에서 꺼내어 나에게 주면서 부탁하기를, “우리가 성씨를 얻게 된 뒤로 수백 년 동안 자손이 번성하는 가운데 벼슬아치가 계속 이어지고 문장과 절행의 인사가 대대로 사책에 끊어지지 않고 기록되었다. 그리하여 청백의 절조와 돈목(敦睦)의 가풍이 지금까지도 쇠해지지 않아 진신(搢紳)들 사이에서 아름답게 일컬어지고 있는데, 이는 실로 우리 선조의 깊은 인덕과 후한 은택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감화를 주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나는 세월이 흐르다 보면 이 문집이 끝내 유실되어 동종(同宗)의 수치가 될까 나름대로 걱정이 된다. 그대가 지금 방백의 임무를 맡게 되었고 보면 어떻게 해 볼 여지가 있을 것이니, 그대는 힘쓰도록 하라.”하였다. 이에 내가 공손히 무릎 꿇어 절하고 사례하면서 삼가 가르친 뜻을 받들었다. 그리고는 즉시 자재를 마련하고 장인을 모아 달성(達城) 객관(客館)에서 중간 작업에 착수한 결과 두 달 만에 일을 마치게 되었다. 다만 편집한 이 문집이 흩어져 없어진 뒤끝에 거두어 모은 것이라서 시문이 부분적으로 빠져서 완전하지 못한데, 목록 아래에 우선 그 수효를 기록해 두고, 잃어버린 것을 수습하여 보충하는 일은 후일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내가 선조를 추모하여 목은 문집을 판각한 승선공(承宣公)의 성의에 이미 감격한 데다가 판부 상공의 간절한 가르침을 또 받들어 행하고는 근본과 시원을 돌이켜 생각하며 선조가 남기신 자취를 어루만져 보노라니, 마치 직접 기침 소리를 듣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면서 구구하게 경모하는 마음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 점이 있다. 이 문집을 열람하는 우리 종인들이 만약 청전(靑氈)을 보존하는 것처럼 선조의 유업을 실추시키지 않고, 적선(積善)할 수 있는 바탕을 더욱 배양하면서 장자(長者)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일이 없게 한다면 어찌 일문(一門)의 보장(寶藏)만 될 뿐이겠는가. 실로 세상의 교화를 돕는 데에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감히 권말에 이런 군더더기 말을 덧붙여서 스스로 경성(警省)하는 자료로 삼고자 하는 바이다. 숭정(崇禎) 을해년(1635, 인조13) 하지일에 후손 통정대부(通政大夫) 수 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守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 이기조(李基祚)는 삼가 쓰다.
稼亭集跋[李基祚]
我先祖稼亭文孝公,牧隱文靖公兩先生。父子相繼。蜚英麗元。道德功業。昭載乘牒。餘事文章。冠絶今古。東人之仰之若泰山北斗。其遺編剩馥。擧一邦殆家有之。而爲登壇操觚者之指南焉。至壬辰兵燹。並失板本。英華之流及後人。事蹟之儀式百代者。獨賴此篇以想其彷彿。而今將湮沒無傳。不徒吾門之不幸。亦斯文之所嘆惜也。吾宗人李承旨德洙甫頃宰昇平。求得牧隱文集。先爲鋟梓。藏諸韓山文献書院以壽其傳。曁不佞按節而南也。宗丈李判府德泂相公袖稼亭集一編囑余曰。吾儕得姓數百年來。子孫繩繼。珪組不替。文章節行之士代不絶書。淸白之操。敦睦之風。尙今不衰。稱艶于薦紳之間。寔我祖之深仁厚澤愈久而愈不斬也。竊恐此書淹延日月。或竟遺亡。爲同宗之羞。子今膺專閫之任。當有爲之地。子其勉之哉。不佞擎跪拜謝。祇領敎意。卽鳩材聚匠。重刊于達城客館。閱兩月工告訖功。第編簡收集於散亡之餘。詩文若干殘缺無存。目錄之下。姑記其數。拾遺補亡。以俟他日焉。不佞旣感承宣公追遠肯構之盛意。又蒙判府相公敎誨之丁寧。原念本始。撫摩遺躅。怳若身承謦咳。區區敬慕之心有不能自已也。庶吾宗之覽斯集者。若保靑氊。不墜素業。益培積善之地。毋負長者之訓。則豈獨爲一門之寶藏。宲爲輔世之一助也。敢贅斯語于卷末。以自警省云爾。時崇禎乙亥日北至。後孫通政大夫守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李基祚。謹識。
[주-D001] 청전(靑氈) : 선대(先代)로부터 전해진 귀한 유물을 가리킨다. 진(晉)나라 왕헌지(王獻之)가 누워 있는 방에 도둑이 들어와서 물건을 모조리 훔쳐 가려 할 적에, 그가 “도둑이여, 그 푸른 모포는 우리 집안의 유물이니, 그것만은 두고 가는 것이 좋겠다.〔偸兒 靑氈我家舊物 可特置之〕”라고 하자, 도둑이 질겁하고 도망쳤다는 고사가 있다. 《晉書 卷80 王羲之列傳 王獻之》
사간본(四刊本)
이상 총 20권으로 된 우리 선조 가정 선생 문효공의 유고는 모두 목은 선생의 산정(刪定)을 거친 것이다. 그런데 간행한 지 이미 오래된 데다 또 누차 병화를 겪어서 거의 없어질 지경에 이르렀는데, 다행히 종인인 상서(尙書) 이공 기조(李公基祚)가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적에 잔결(殘缺)된 원고를 찾아내어 대구(大丘)에서 출판하였다. 하지만 자손의 입장에서는 전질을 얻지 못한 것을 항상 한스럽게 여겨 왔다. 그러다가 지난 무술년(1658, 효종9) 겨울에 내가 충청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우연히 여행하던 도중에 전본(全本)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급히 간행할 계획을 세웠으나 곧바로 직임을 그만두게 되어 실행에 옮기지 못했으므로 끝내 전파할 수 없게 될까 항상 걱정하였다. 그런데 다행히 요즘 와서 또 성은을 입고 전라도 관찰사로 오게 되었다. 지금 마침 시절이 곤궁한 때를 당하여 자칫 사치스럽게 낭비한다는 혐의를 물론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지금의 기회를 놓치고서 도모하지 않다가는 두고두고 회한의 정을 품게 될 것도 같았다. 그래서 감히 봉록을 털어 완산(完山 전주(全州) )에서 판각 작업에 착수하였는데, 금산 군수(錦山郡守) 안공 헌징(安公獻徵)과 고산 현감(高山縣監) 이공 항진(李公恒鎭)이 또한 외손(外孫)으로서 함께 이 역사를 도와 한 달이 채 못 되어 일을 모두 마치게 되었다. 아, 우리 선조의 문장과 덕행이 사적에 분명히 기재되어 있고 보면, 이 유고가 전해지고 전해지지 않는 것이야 별로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선조를 간절히 추모하는 자손의 심정에서 본다면 이것 말고 또 어디에 마음을 부칠 수가 있겠는가. 지난날 하마터면 유고가 완전히 없어질 뻔했다가 상서공 덕분에 그 반절을 얻었고, 지금 또 불초인 나를 통해서 완전해질 수 있게 되었으니, 잔결되기도 하고 완전해지기도 한 배후에는 이른바 현회(顯晦)의 운수가 작용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현재 내손과 외손을 막론하고 고위 관원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 역시 우리 선조가 덕을 쌓은 결과 후손이 받게 된 경사 아닌 것이 없고 보면, 앞으로 영구히 전해질 수 있는 것이 어찌 단지 눈에 보이는 이 시문들뿐이라고만 하겠는가. 이와 함께 나름대로 생각나는 것이 있다. 우리 동종이 지파(枝派)로 나뉘면서 이름이 드러난 자가 물론 많지만, 그중에는 또 쇠미해서 떨치지 못한 채 근근이 평민과 같은 생활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으니, 그들이야 어느 겨를에 선조를 위한 아름다운 계책을 도모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다행히도 우리 인재공(麟齋公)의 후예는 그다지 쇠미하지 않아서, 우리 숙부인 참의공(參議公) 덕수(德洙)가 승평(昇平 순천(順天) )에서 정사를 행하던 날에 목은의 문집을 중간하였고, 공의 윤자(胤子)인 지금의 강원도 관찰사 홍연(弘淵)이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당시에 인재의 묘소에 비석을 세워 세덕(世德)을 크게 드러내어 밝혔으며, 불초인 내가 공산(公山 공주(公州) )의 수령으로 있을 적에 《인재유고(麟齋遺稿)》를 간행한 데 이어 오늘날의 이 역사도 불초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비록 가정과 목은의 유택이 끝없이 자애롭게 후손들에게 내려진다고 하더라도, 이는 또한 인재공이 북돋워 키운 데 따른 것으로서 그 감응이 이와 같으니, 이 어찌 주부자(朱夫子)가 “성년(盛年)의 고절(苦節)이 이제 그 보답을 받게 되었다.”라고 말한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감개하며 비창(悲愴)한 심정을 가누지 못한 채 삼가 그 전말을 이상과 같이 적는 바이다. 갑신(甲申) 후 19년인 임인년(1662, 현종3) 3월 상순에 후손 통정대부(通政大夫) 수 전남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전주부윤(守全南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全州府尹) 태연(泰淵)은 무릎 꿇어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쓰다.
稼亭集跋[李泰淵]
右吾先祖稼亭先生文孝公遺稿捴二十卷。皆經牧隱先生之删定者。刊行旣久。且屢經兵火。幾乎泯沒。幸賴宗人尙書李公基祚按節嶺南。搜得其殘爛。入榟於大丘。而爲子孫者每以不得全帙爲恨矣。頃在戊戌冬。泰淵忝按湖西。偶得全本於逆旅中。亟謀鋟榟。旋罷未果。常惧其終不得傳布。幸於今日。又蒙 聖恩。來按湖南。適當時屈。固有擧嬴之嫌。而失今不圖。恐抱無涯之恨。玆敢損俸開板於完山。而錦山郡守安公獻徵,高山縣監李公恒鎭。亦以外裔共相斯役。不閱月而工告訖功。噫。吾先祖文章德行。昭載史籍。則遺稿之傳不傳。雖若無所輕重。而子孫羹墻之慕。舍是而于何寓焉。向日之幾乎永泯者。賴尙書公而得其半。今又因不肖而能得其全。其或缺或完者似有顯晦之理。而目今內外裔派之圭組嬋嫣者。無非吾先祖積德之餘慶。則其可傳於永久者。豈特此咳唾之餘而已哉。仍竊惟念吾同宗枝分派別。名顯者固多。而亦或有衰微不振。僅同編氓。何暇先懿之圖哉。惟幸吾麟齋公之裔不甚陵替。吾叔父參議公德洙視篆昇平之日。重刊牧隱集。其胤今關東伯弘淵曾按海西。建石麟齋墓。大闡世德。不肖昔宰公山。刊行麟齋稿。而今日此役。又成於不肖之手。雖稼牧遺澤慈覆於無窮。而亦由於麟齋公所封植者其應如此。則豈朱夫子所謂盛年苦節。且享其報者非耶。不勝感愴之懷。謹識其顚末如右云。甲申後十九年壬寅三月上浣。後孫通政大夫守全南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廵察使全州府尹泰淵。拜手稽首謹識。
[주-D001] 인재공(麟齋公) : 인재는 목은의 둘째 아들인 이종학(李種學 : 1361~1392)의 호이다. 1392년(공양왕2) 8월 정몽주가 피살된 후에, 그의 당으로 몰려 함창(咸昌)에 유배되었다가 장사현(長沙縣)으로 이배(移配)되던 중에 무촌역(茂村驛)에서 32세의 나이로 교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주-D002] 성년(盛年)의……되었다 : 주희의 문집인 《회암집(晦菴集)》 권91〈부인여씨묘지명(夫人呂氏墓誌銘)〉에 “사람들은 말했다. 부인이 젊었을 때 고생하며 지킨 절조가 이 아들을 둠으로 해서 이제 그 보답을 받게 되었다고.〔人謂夫人盛年苦節 以有斯子 今且享其報矣〕”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3] 갑신(甲申) : 1644년(인조22)으로, 청 세조(淸世祖)의 순치(順治) 연호가 시작되는 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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