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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나말여초 문단 거물 최언위와 그의 네 아들(1)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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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십국시대. 분열한 당 제국. 이 무렵 최언위는 중국 땅에 있었다.

 
나말여초 문단을 호령한 인물로 최치원崔致遠(857~?), 그리고 견훤을 섬긴 최승우崔承祐(?~?)와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이 같은 경주최씨로 그보다는 열한 살 어린 최언위崔彦撝(868~944)다.

치원과 언위 둘은 당나라 유학파로 그에서 급제한 인생 행로가 아주 비슷한데, 또 세트로 움직이기도 했으니, 다만, 최치원은 나말에 해인사로 은거한 뒤에는 행적이 묘연한 데 견주어, 최언위는 달라서 오래산 까닭도 있지마는 고려가 건국한 다음에는 아예 주거지를 경주에서 개경으로 옮기고, 고려 조정에서 문한을 담당한다. 

고려사 열전이 정리한 그의 행적을 보면 초명初名이 신지愼之라 했으니, 이는 삼가고 삼갈지니라 하는 뜻에서 취한 이름이라, 다만 그 바꾼 이름 언위彦撝는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를 내가 아직 추적하지는 못했다. 그의 족형이라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치원致遠은 멀리까지 치닫는다는 뜻에서 취한 이름이다. 

언위를 일러 열전은 성품이 관대하고 인자하고 어릴 적에 이미 글짓기를 잘했다 하거니와, 18세에 당에 가서 유학가서는 예부시랑禮部侍郞 설정규薛廷珪가 주관한 과거시험에서 발해浡海 재상宰相 오소도烏炤度 아들 광찬光贊과 같은 때에 급제했다 한다.

그는 입국이 매우 늦었다. 마흔두 살에 비로소 신라로 들어와서는 집사성시랑執事省侍郞 서서원학사瑞書院學士에 임명되었다 했으니, 이때는 계산하면 909년, 신라 효공왕 13년째라, 이 무렵이면 신라는 거의 뼈다귀만 남은 시절이었다. 

나아가 신라 사람이요 경주 출신이라고는 하지마는 외국인 특례 채용에 가까웠다고 보아야 한다.

이에서 궁금한 점은 이런 뼈다귀만 남은 신라 귀국길에 그가 왜 올랐을까다. 

이는 볼짝없이 당시 동아시아 사정과 밀접하다. 신라가 개판됐지만, 당은 더 개판이라 아예 와해했다. 절도사가 난립하고 북쪽에서는 거란이 한창 흥기하던 무렵이라 그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나아가 그가 귀국할 때 이미 마흔두살이라, 틀림없이 당 체류 기간에 장가를 갔을 것이며, 그에서 장성한 자식도 두었을 법한데, 그 마누라는 신라 사람이었을까? 또 문제는 그 아이들이라, 그들이 신라말을 했을까? 나는 못했다고 본다. 

고려사 열전에는 네 아들을 거론했으니 최광윤崔光胤·최행귀崔行歸·최광원崔光遠·최행종崔行宗이 그들이다. 이 네 아들은 내가 이미 지적했듯이 아주 묘해서 두 사람씩 같은 항렬자를 쓰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광윤光胤과 광원光遠은 같은 돌림을 썼고 행귀行歸랑 행종崔行宗이 또 그렇다. 나는 이들 형제가 어머니가 달랐기 때문에 이렇지 않은가 의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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