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내 혹은 시내라는 말이 있다.
나같은 산골촌놈한테는 언제까지는 도회라는 말로 등치했다.
그 읍내는 언제나 시외버스정류장과 연동했으니 그 승강장 2층엔 계란노른자 동동 띄운 쌍화차를 팔았다.
경북 금릉군 대덕면 조룡1리 양지마을이 집인 나는 국민학교 졸업 때까지만 해도 면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어 계우 전과 사러 인근 지례면을 두어번 밟아봤을 뿐이요, 조마엔 몇번을 갔으니 언제나 포도가 익는 계절이었다는 기억만 있다.
그 조마엔 외가라 하지만 실은 내 외가가 아니요 나와는 배가 다른 큰누나 그리고 나중에 죽은 형의 외가가 있었으니 꽤 잘 사는 집이었고 포도농장을 해서 배터지게 포도는 먹은 기억이 있다.
덧붙여 국민학교 입학 전엔 창원 고모 찾으러 나선 아버지와 큰아버지 따라 창원을 간 적 있으니 그때 기차라는 걸 첨으로 타 보고 밀감이란 요물도 첨으로 구경했다.
여자들 스타킹 같은 망태에 한 줄로 찡군 밀감 말이다.
창원이라 해서 유별날 것은 없어 온통 초가였으며 땔감으로 짚을 땐 기억만 있다. 칠흙같은 밤에 도착했으니 그 다음날 내려다본 창원 시내는 온통 초가라 한국전쟁 직후 우리한테 익숙한 그 빈민도시 풍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다 면에서 하나뿐인 대덕중학교에 가면서 서서히 행동반경을 넓혀갔으니 그땐 다들 축구에 미칠 때라 지례며 고개넘어 거창 안의로 축구시합하러 오가기도 했다.
그 무렵 대구라는 데를 첨 갔던 듯 하고 서울 땅도 딱 한번 밟아봤다. 부천 원미동 사는 큰누님 집에 기거했으니 그때 책방에서 구입한 유일한 책이 보카쵸 데카메론이었다.
김천고로 진학하면서 이후 나는 영영 집을 떠나게 되었으니 부곡동 황금동 등지 네 군데를 떠도는 자취생활이 그 시작이었다.
집에선 쌀을 가져오곤 했으니 하도 굶어서 언제나 쌀이 남아돌아 가끔씩 시장에다 쌀을 내다 팔기도 했으니 엄마가 걱정하는 까닭에 쌀을 주기로 비워야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 같은 처지로 제일로 부러운 친구들이 누나가 있는 친구들이었다. 그런 친구들은 누나가 밥을 꼬박꼬박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가정형편이 좋은 것도 아니어서 거기다 그 허울좋은 야간자율학습이며 해서 새벽 같이 나섰다가 밤늦게 귀가하는 그 생활을 버텨낼 재간이 없어 굶는 일이 능사가 되었으니 내가 싸는 벤또라고 해봐야 맨 반찬이 김치뿐이었으니 그런 벤또도 싸가지 않는 날이 다반사였다.
하루 한 끼나 먹었을까? 한창 먹어야 할 그때 나는 허기와 싸웠고 빈혈을 달고 살았다.
하도 배가 고픈데 어느날 헌혈을 하면 우유 하나랑 카스테라 빵 하나를 준다기에 피를 뽑았으니 배가 고파서였다.
꼭 그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 피를 뽑고선 핑핑 돌았다. 이후 나는 헌혈이란 걸 해 본 적이 없는데 그 기억이 하도 사나워서였다.
학교 구내 입구엔 매점이 있었다. 학교설립자 최송설당 할매 양자가 운영했으니 라면도 팔았으며 그 라면 냄새가 그리도 부러웠으나 난 그 라면 한 봉다리 사먹어 본 적 없다.
돈이 없어서였다.
그렇게 버티며 예까지 꾸역꾸역 왔다.
가끔은 그런 내가 대견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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