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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굴꾼 때를 타지 않은 무령왕릉은 백제 왕과 왕비가 죽어 어떤 방식 혹은 껴묻거리와 더불어 장송葬送했는지를 적나라히 보여주었으니,
그것이 출토한 유물은 왕과 왕비 합장릉이라 해서 적지 않은 수량을 자랑하지만, 문제는 동시대 신라 무덤에 견주면 그 수량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 무령왕 부부릉 출토품이 많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이것도 상대성에 지나지 아니해서 동시대 혹은 그 어간 아래위로 위치하는 동시대 황남대총이나 천마총을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를 빚게 된다.
왜 이런 부조화가 빚어질까?
실로 단순한 이 질문을 나는 고고학도가 던지는 모습을 못 봤다.
왜일까?
나는 그게 궁금해 죽겠는데 저들은 왜 넋놓고 딴 데만 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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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신라 동시대 무덤 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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