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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백척간두에 선 왕실을 다시 세운 최항, 불교로 돌진하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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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관 스무살에 장원급제하면서 화려하게 중앙 정치 무대에 등단한 최항崔沆을 하현강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기술하면서 사망연도는 1024년(현종 15)라 기록하면서, 어찌하여 출생연대는 모른다 했는지 알 수가 없거니와, 그것은 다름 아닌 그의 출생 연대가 명확히 계상이 되는 까닭이다. 

고려사랑 고려사절요에 모두 현종 15년 6월 5일 신유일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최항崔沆이 졸했다 해서 명확히 죽은 시점이 적기됐거니와,

고려사 본기와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그가 성종 10년, 991년 윤 2월에 실시된 과거시험에서 그가 급제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한편, 고려사 그의 열전에서는 字가 내융內融이며, 평장사 최언위崔彦撝 손자인 그가 성종 때에 나이 20세로 갑과甲科에 급제했다 하거니와, 이로써 보면 그는 972년 광종光宗 23년에 태어났음을 안다. 

그의 최고 공적은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을 옹립한 일이다. 이 대목을 고려사 그의 열전에서는 “왕(목종-인용자 주)이 병석에 눕게 되자 김치양金致陽이 반역을 꾀하므로, 최항이 채충순蔡忠順 등과 함께 대책을 세워 현종顯宗(대량원군 왕순-인용자 주)을 맞아 즉위시켰다”고 했으니, 이 일은 이른바 강조의 변과 연동하는 사건임은 여러 번 말했다. 

이때가 1009년이라, 최항이 38세 때 일이며 그가 맡은 관직은 정삼품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였다. 조선시대로 치면 승지 혹은 도승지 정도에 해당하는 고위직이었으니, 스무살에 등단했다 하지만, 이미 이때 관직에 진출한지 18년이나 지난 때라 나이에 견주어 고위직이라 할 수는 있지만, 그럴 만한 자격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황룡사지 by 오세윤



왕이 쿠데타로 시해되고 후계자가 정해지지 아니한 비상상황에서 대량원군을 옹립한 것은 그가 맡은 직책이 그 일에 나설 수밖에 없는 곡절도 있었으리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새로운 권력 출범과 함께 그 최대 공신 중 한 명인 최항은 한림학사승지 좌산기상시翰林學士承旨 左散騎常侍를 제수되고, 또 그 직책을 겸하면서 왕의 사부師傅가 된다. 한림학사 승지 좌산기상시가 어드메쯤인지 확실치는 아니하나, 지금의 대통령실장에 홍보수석에 춘추관장쯤 아닌가 싶다. 

사부 임명 당시 대량원군은 992년생이라 이제 18살, 친정은 할 나이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어렸다. 그런 까닭에 외풍을 막아볼 요량으로 현종은 최항을 지목해 방배막이로 삼으로 했다고 보아야 한다. 사부 임명과 동시에 현종은 그를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삼았다 했으니 이 직책이 왕의 사부가 맡는 자리임을 엿본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최언위 이래 가풍이 유교를 터전으로 삼는 학자 가문이었고, 그 자신도 이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시대 분위기는 유교가 불교랑 배척하지 않는 모습을 자주 보이는데, 최항은 지독한 불교신자이기도 했다.

이런 그를 일러 고려사 그의 열전은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지나쳐 황룡사黃龍寺 탑을 수리할 것을 요청하였고, 몸소 감독하며 농사일에 바쁜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쳤는가 하면 자기 집에도 불경과 불상을 모셔두고 승려처럼 살았는가 하면, 종국에는 집을 희사하여 가람으로 삼았다” 했다. 
 

황룡사지 by 오세윤



한국불교사에서는 대서특필해야 하는 재가신도였다. 오죽 했으면, 그 유명한 황룡사 탑을 고치자 주장했겠으며,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생각했음인지 직접 경주로 내려가 공사 감독을 했겠는가? 

고려사 찬자들은 저 일을 분명히 비난 조로 적었다. 자고로 유자라면, 또, 관료라면 저리해서는 안 되는데, 저런 일을 무리하게 밀어부쳤고, 더구나 그 과정에서 무리하게 백성들을 동원하는 바람에 원성이 자못 크게 일었다고 비난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없었다. 그가 가는 법륜法輪은 브레이크가 없었다. 마침내 성종이 파괴해 버린 팔관회까지 부활하자고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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