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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너무나 먼 당신, 접선이 불가능한 김은부와 하공진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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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부 탈출을 돕는다고 설정한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한 장면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은 거란 조정에서 생활하는 고려 출신 하공진河拱辰이 거란에 사신으로 왔다가 억류 당한 김은부金殷傅를 도와 탈출케 하려다가 이 일이 탄로나는 바람에 붙잡혀 죽임을 당한 것으로 설정했지만, 이는 역사적 근거가 받침하지 아니하는 작가 설정이다. 

다만 그렇게 볼 만한 여지는 있다. 김은부가 거란을 달래려 사신으로 간 시점과 하공진이 거란에서 탈출을 감행하다 탄로나 죽임을 당하는 시점이 묘하게 합치하는 까닭이다. 

고려사와 절요를 보면 막 개경을 함락하고 불사르고 철군한 거란을 그래도 이렇게든 저렇게든 달래서 추가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었음이 분명한데, 1011년 11월 13일 임오壬午에 고려 조정은 형부시랑刑部侍郞 김은부를 거란에 사신을 보내어 거란 성종의 생신을 하례케 한다. 

김은부는 앞서 보았듯이 현종이 파천할 당시 공주절도사로, 환궁하는 현종한테 자기 딸을 바쳐 중앙 정계 무대에 화려하게 등단한 사람이라, 무관이었던 듯하고, 거란으로 갈 당시 직책 형부시랑은 흔히 사법부 차관이라 설명하지만, 이 당시 형부刑部는 사법 만이 아니라 외교 관계도 전담한 기관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든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가 거란 외교사절로 간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실제 발해를 보면 형부에서 외교를 전담했다. 

드라마는 왕의 장인으로서 그런 그를 차마 거란이 죽이지는 못할 것이라 해서 고려 조정에서 일부러 골라 보낸 것으로 설정했지만, 사신을 아무나 보내는 것도 아니고 엄격히 그때도 담당부서가 따로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떻든 예상대로 당시 고려 거란 관계는 최악이라, 김은부는 억류되고 말았다. 황제 생일을 축하한다고 온 외교사절을 억류한 일은 관례에도 벗어난다. 이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보기로 하고. 

이 무렵 하공진 처형 사건이 일어난다. 
 

저 비슷한 말은 한 것으로 역사는 적었다. 고려거란전쟁 캡처

 
고려사랑 절요에 의하면, 이 일은 김은부가 사신으로 간 바로 다음달, 곧 1011년 12월 사건이라 저록한다. 고려사절요 해당 사건 정리다. 

거란이 하공진河拱辰을 죽였다. 처음에 하공진이 억류되어 속으로는 귀국하기를 도모하면서 겉으로 충성과 근실함을 보였더니, 거란의 군주가 더욱 총애하고 우대하였다. 하공진은 고영기高英起와 더불어 은밀히 모의하고는 아뢰기를 “본국이 지금 이미 망하였으니, 신들은 원하건대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점검한 뒤에 돌아오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거란 군주가 이를 허락하였는데, 이윽고 왕이 도성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들리자 고영기를 중경中京에 거주하게 하고 하공진은 연경燕京에 거주하게 하면서 모두 양가 딸을 처로 삼도록 하였다. 〈이에〉 하공진은 좋은 말을 많이 사두어 동쪽으로 난 길에 잇따라 배치하고는 이로써 돌아갈 계책을 삼자, 어떤 사람이 그의 계책을 아뢰어서 거란의 군주가 그를 국문하게 되었다. 하공진은 사실대로 갖추어 대답하고 또한 말하기를 “신은 본국에 대하여 감히 두 마음을 품을 수 없습니다. 죄는 마땅히 만 번 죽을 것에 해당하지만, 살아서 대조大朝를 섬기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거란의 군주는 그를 의롭게 여겨 용서한 이후 절의를 바꾸어 충성을 바치도록 만들고자 회유하였다. 하공진은 사양하고 더욱 강경하게 순종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죽임을 당하였다.

하공진과 고영기는 이보다 대략 1년 전인 1011년 1월 3일 정축丁丑에 개경을 함락하고 그곳에 성종이 체류하는 가운데 거란 진영으로 파견되어 철군을 요청했다가 그대로 억류되었다 했으니, 이후 행적을 보면 거란이 철군할 때 놓아주지 않고 인질처럼 거란으로 데려갔음을 알 수 있다. 

둘은 분산 배치됐다. 둘이 붙어있으면 불궤한 일을 도모한다 생각했음인지, 거란 조정은 둘을 아주 멀리 떼어놓아 고영기는 거란 서울에 머물게 하는 한편 하공진은 저 남쪽 지금의 북경에 설치한 부수도 연경에다 쳐박아 버렸다. 

따라서 김은부랑 하공진이 거란에서 만날 일은 없었다. 

드라마는 거란 땅이 코딱지 만한 시골집처럼 그렸지만, 거란은 땅이 광활하기 짝이 없어 두 사람이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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