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나는 이른바 보존과학으로 통칭하는 문화재학 자역과학이 처한 상황을 이른바 정통 문화재학 범주로 취급하는 고고학이니 하는 분야를 빛내게 하는 데코레이션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했거니와(맨 뒤에 첨부하는 글 참조),
그를 이어 그렇다면 보존과학이라 통칭하는 문화재학 관여 자연과학 문제는 없는가? 이 대목을 점검한다.
나아가 이번 글은 앞선 신동훈 선생 글, 곧
고고학에 드리는 고언 (6): 아웃소싱
그에 대한 김태식의 보완이라는 측면도 있다.
이를 위해 우선 일화 하나를 들겠다.
(1) 신동훈 선생 고고학 관여 초창기 시절
신동훈 선생은 자연과학도로, 더 범위를 좁히면 의학도로 고고학에 입문할 당시에는 단국대 의대 교수였으며, 이후 모교인 서울대의대, 곧 서울대병원으로 전직한 의사다.
주된 전공은 해부학이지만, 이 해부학이라는 학문은 신 교수 말을 들으면 그 교보재는 이미 오백년 전에 나온 그것이랑 변화가 없다 하는데, 뭐 그렇다고 사람 뼈나 내장이 500년 전과 지금이 달라졌겠는가?
바로 저런 학문 특성 때문인지, 자연히 관련 분야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연구분야 개척에 나서게 되는데, 그가 착목한 것이 고인류학 고병리학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고고학 현장에 발을 디뎌야 했다. 왜인가? 그 연구재료가 되는 자료는 고고학 현장에서 나오는 까닭이었다.
당시 가끔 조선시대 미라가 출현해 언론의 각광을 받기도 했지만, 아주 간헐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것이 본격 학문으로 정립하지는 않았으니, 이것이 내가 생각하기에는 신 교수로서는 행운이었다 보는데, 의학 쪽에서도 이 분야를 전문으로 개척한 선구자가 없었다.
다만, 내가 오늘부터 미라 혹은 인골을 기초로 해서 의학사를 하겠다고 선언한다 해서 곧바로 연구가 나오겠는가?
그 자신 표현을 빌리자면 그 초창기에 5년 간 명함을 들고 다니며 조사단에 돌렸는데, 연구의뢰가 전연 없었다고 한다.
내가 이 사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까닭은 그가 고고학 현장에 침투하는 통로 중 하나가 나였기 때문이다.
다른 통로로 많이 뚫었겠지만, 내가 집중적으로 이런저런 조사기관 혹은 고고학도들 선을 놓았으니, 일부러 인골이 나왔다는 발굴현장에 신 교수를 모시고 가기도 했다.
아무튼 초창기에 고생께나 했는데,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정이 달라져 나중에는 들어오는 인골을 주체하기 힘든 시대로 접어들었으니 격세지감이라 할 만하다.
그 과정에서 출산 과정에서 사망한 하동 여성미라인가는 해포 과정 전체를 하루종일 지켜보다 내가 죽는 줄 알았다.
아무래도 이 얘기는 길어질 듯해서 일단 예서 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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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과학을 진단한다 (1) 시녀 도구로 삼은 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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