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익산시 금마면 이른바 서동생가터에서 북주北周시대 중국 동전 ‘오행대포五行大布’ 5점이 집터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이 오늘 공개됐거니와
북제北濟는 북주와 더불어 황하 유역을 양분한 양대 왕조로, 얼마 뒤 북주에 합병됐지만, 그런 북주도 이내 수 왕조에 대체되고 말았다.
북주건 북제건 단명한 왕조인데, 그 명칭을 딱 봐도 중심지가 어디냐를 짐작하니, 濟는 말할 것도 없이 그 뿌리를 강태공으로 올라가는 산동성 일대이며, 周는 주왕조 중심지가 서안과 낙양이었으니, 볼짝없이 저쪽을 장악한 왕조였다.
북주와 북제는 동시대에 존재한 왕조이며 실상 그 뿌리는 북위라는 점에서 같이 봐야 한다.
이번에는 북주 동전이 나왔다 해서 관심이겠지만, 그와 양립한 북제 시대 동전도 나온 적 있으니, 부여 왕흥사지다. 시계추를 거슬러 2007년으로 올라간다.
당시까지 한국고고학 망령으로 군림하던 전세기간을 박살낸 기사다.
부여 왕흥사지서 출토된 中 동전 상평오수
송고시간 2007-11-15 11:05
유통시기와 거의 같아..'傳世기간' 무색
(부여=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백제 창왕이 발원했다는 증거가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부여 왕흥사(王興寺) 목탑 터 주변에서는 무수한 사리공양품이 출토됐다. 이 중에 '상평오수'(常平五銖)라는 중국 동전 2점도 포함돼 있다.
발굴조사기관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김용민)는 이 동전을 창왕 시대 백제가 중국의 북조(北朝) 왕조와 교류를 활발히 했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물로 들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중국에서 주조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백제 목탑에 묻혔다는 사실이다.
상평오수는 북조 왕조 중 하나인 북제(北齊.550-577) 왕조에서 그것도 24년이란 짧은 기간(553-577)만 주조되고 유통된 동전이다. 왕흥사 목탑은 그 심초석 사리공에서 출토된 사리함 명문(銘文)에 의해 577년에 세워진 것으로 밝혀졌다.
상평오수가 중국에서 주조되고 유통되던 그 시기에 백제 목탑에 매장됐다는 것은 백제로 대표되는 당시 고대 한반도 문화가 중국 본토와 긴밀히 연동되어 전개됐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대전대 이한상 교수는 "지금까지 한국 고고역사학계에서는 중국 유물이 한반도 유적에서 출토되면, 이른바 '전세(傳世)기간'이란 시간을 설정해 그런 유물이 중국에서 생산되고 유통된 시기보다 반세기 가량을 늦잡는 경향이 많다"고 말했다.
예컨대 서기 100년에 중국에서 생산된 동경(銅鏡)이 한반도 어떤 유적에서 출토되었다고 가정하면, 그런 유물을 출토한 한국 유적이 축조된 시기를 서기 150년 무렵으로 설정하곤 한다는 것이다.
한국 고고학계에서 애용하는 '전세기간'이란 말은 쉽게 말해 중국에서 생산되고 유통되던 문물이 한반도에 전해지기까지 걸린 시간을 의미한다.
일본 고고학계에서 유입된 이와 같은 '전세기간'이란 개념은 고고학계 절대 다수의 지지를 받으면서 한국고고학이나 고대사 편년(編年)을 세우는 '절대법칙'처럼 통용되곤 한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이 없지는 않았다.
여타 연구자처럼 '전세기간'이란 개념을 적용해 한국고고학 편년을 수립했던 충남대 박순발 교수는 최근 들어 '전세기간' 포기를 선언했다.
박 교수는 백제시대 고분에서 더러 출토되는 중국제 도자 일종인 계수호(鷄首壺)를 예로 들면서 "이런 청자가 중국에서 백제로 유입되는 데 무슨 50년이나 걸리겠느냐?"고 반문할 정도다.
사실 중국 유물을 기준으로 한국고대사 편년을 그보다 50년 가량 늦춰 잡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가설'인지는 1971년 백제 무령왕릉 발굴을 통해 분명히 드러났다.
525년에 무령왕이 묻힌 이 왕릉에서 개국한 지 20년 채 되지 않는 중국 남조 양(梁)나라 수입품이 부지기수로 나왔기 때문이다.
한반도 고대문화가 중국대륙의 그것과 동시에 연동했다는 이처럼 명백한 증거가 있었음에도 한국 고고역사학계에서는 '전세기간'이란 개념을 여전히 신주단지 모시듯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에 왕흥사지에서 발굴된 북제 시대 상평오수는 북제서(北齊書) 중 제기(帝紀) 제4에 의하면 문선제(文宣帝) 천보(天保) "4년(553) 봄 정월 기축일(己丑)에 새로운 동전을 주조케 하니, 그 동전에는 '상평오수'(常平五銖)라는 문구를 새겼다"고 해서 등장시기를 확실히 알 수 있다.
나아가 수서(隋書) 중 식화지(食貨志)에서는 "문선제가 선양을 받은 뒤에 영안오수(永安五銖)를 폐기하고 새로이 상평오수를 주조하니, 그 무게는 동전에 쓰인 문구(5수)와 같았다"고 하면서 "북제가 멸망하자 마침내 (상평오수를) 통용이 금지됐다"고 해서 폐지된 시기가 북위가 멸망한 해이자, 왕흥사 목탑이 들어선 577년임이 밝혀진다.
tae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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