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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삼국지가 말하는 그 무수한 삼한 성곽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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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 3세기 초중반? 흔적들

 
 
3세기 중후반에 편찬했다는 삼국지三國志 중 위서 魏書30 동이전東夷傳 이른바 한韓 조를 보면 

마한馬韓은 서쪽에 위치하였다...[國마다] 각각 장수長帥가 있어서, 세력이 강대한 사람은 스스로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邑借라 했다.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았으며 성곽城郭이 없다.

○ 馬韓西...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 其次爲邑借, 散在山海間, 無城郭. 

라 했지만 이는 개소리라, 스스로 모순을 일으키니 같은 마한전에서 이르기를 

그 나라 안에 무슨 일이 있거나 관가官家에서 성곽城郭을 쌓게 되면, 용감하고 건장한 젊은이는 모두 등 가죽을 뚫고, 큰 밧줄로 그곳에 한 발[丈]쯤 되는 나무막대를 매달고 온 종일 소리를 지르며 일을 하는데, 아프게 여기지 않는다. 그렇게 작업하기를 권하며, 또 이를 강건한 것으로 여긴다.

其國中有所爲及官家使築城郭, 諸年少勇健者, 皆鑿脊皮, 以大繩貫之, 又以丈許木鍤之, 通日 嚾呼作力, 不以爲痛, 旣以勸作, 且以爲健.

여기 보면 분명 마한 권 國들에는 분명히 성곽이 있었다. 

더 간단히 말한다. 3세기 중후반 이전에 마한에는 성곽이 곳곳에 포진했다. 

한데 왜 한 놈도, 그 어떤 고고학도도 이딴 소리를 안 하는가?

실제 그네들이 그렇게 많이 파제끼고도 3세기 중후반 이전 서성곽은 없다고 단언한다. 

풍납토성? 젤로 웃기는 양반이 박순발. 그 남쪽 몽촌토성이 더 빠르다는 신념을 굽히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몽촌토성 축조 연대는 3세기 중후반이라 한다. 

3세기 중후반?

그가 말하는 그 근거를 아무리 따져봐도 내 대가리가 티미해서인지 단 한 군데도 동의할 구석이 없다.

비단 박순발만 아니라 한국고대사 고고학에는 3세기 중후반이라는 저 말이 거의 신앙처럼 군림한다. 

저 마한전 앞대가리만 신주단지 받들 듯하면서 3세기 중후반 이전에 등장한 성곽은 단 한 개도 없댄다. 

있었다는 성곽은 도대체 어디 갔단 말인가?

다음 같은 동이전 진한辰韓 조 기술

마한馬韓 동쪽에 위치하며...그곳에는 성책城柵이 있다.

辰韓在馬韓之東...有城柵. 

분명 진한에도 성곽이 있다 했다. 

그 있었다는 성곽들 지금 도대체 어디 가 있는가?
 

대규모 택지 조성. 저 단면 봐라.

 
다음 같은 한전 변진弁辰 전.

변진은 12國으로 되어 있다. 또 여러 작은 별읍別邑이 있어서 제각기 거수渠帥가 있다. 세력이 큰 사람은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에는 험측險側이 있고, 다음에는 번예樊濊가 있고, 다음에는 살해殺奚가 있고, 다음에는 읍차邑借가 있다.

弁辰亦十二國, 又有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其次有 險側, 次有樊, 次有殺奚, 次有邑借. 

12개 국에 엄격한 질서가 있다. 이는 마한전에서도 엿보이는 대목이다. 

간단히 말해 마한도 변진도 같은 國이 아니라 大國이 따로 있었고 이 대국은 그 대빵을 신지라 했다.

이 대목이 나머지 작은 국들과 동등한 관계였다는 말인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할 것 아닌가?

대국은 다른 소국들을 부용국으로 거느렸다.

간단히 말해 저 시스템은 신지를 중심으로 하는 봉건적 질서를 말함이다. 

공후자작남 딱 5제후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것이 3세기 중후반 한반도 사정이다! 

다음 이어지는 같은 변진전 대목 

변진弁辰은 진한辰韓 사람들과 뒤섞여 살며 여기도 성곽城郭이 있다. 

○ 弁辰與辰韓雜居, 亦有城郭. 

분명 변진에는 성곽이 있다. 

그 있었다는 성곽들 도대체 어디 갔단 말인가?
 
보다시피 한반도 곳곳에는 3세기 중후반 이전에 성곽들이 포진했다. 

한데 왜 한 놈도 3세기 중후반 이전 성곽이 없다 하는가?

고고학 잘못인가?

나는 그리 본다. 

무엇을 잘못했는가?

해석을 못했다고 본다. 

파 놓고 해석을 못하니 엉뚱한 이야기들만 지껄여댄다. 

성벽 째서 3세기 이전 단계 유물이 나와야 그 성곽이 3세기 중후반 이전? 

웃기는 소리.
 
경주 월성?

분명 삼국사기에는 서기 100년 무렵 파사왕이 쌓았다고 했다. 

경주연구소에서 팠더니 얼추 비슷한 시대 흔적이 농후하게 나왔다. 

그네들 말로는 3세기 초중반, 그러니깐 서기 200~250년 무렵 대규모 택지 조성 흔적이 나왔다고 한다. 

한데 뻘소리만 일삼고 있다. 

성벽은 4세기에 쌓았고 저 대규모 택지는 100년 전에 등장했단다. 

얼마나 웃기는 소린가?

대규모 택지조성하고 관련 의식도 대대적으로 치렀으면서 택지만 덜렁 조성했다고?

그 택지 조성 단면 짤랐더니 완전히 성벽 축조 방식이네?


혹자는 목책이라서 흔적이 잘 남지 않았다 한다.

웃기고 자빠졌네. 마한전 기술 봐라 지게 지고 흙 퍼다 날랐다.

나아가 성벽을 쌓는데 공권력이 작동하고 있다. 官家가 동원 주체가 되어 있다. 왜 이 말을 허심히 흘려버리는가? 

국가의 이름으로 성곽을 쌓은 것이다.

 

대규모 대지 만들고 100년 뒤에 성벽을 만들었다는 언어도단 고고학도 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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