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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독설고고학] 토기 타령 집터 타령 도토리 타령, 타령타령타령만 일삼은 암사동 유적

by taeshik.kim 2024.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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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고학사전(2001)
암사동 유적(서울 岩寺洞 遺蹟)

설명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에 있는 선사시대의 마을유적으로 사적 제267호이다.

유적은 한강 아래쪽의 하안단구에 위치하며 강 건너에는 아차산성이 마주한다.

1925년의 대홍수로 유물 포함층이 드러나면서 널리 알려졌고, 이때 橫山將三郞나 藤田亮策 등 일인학자들이 엄청난 양의 토기·석기를 채집하였다고 한다.

광복 후에도 여러 차례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1966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조사단에 의해 정식 발굴되었다.

이때에는 원형 움집 2기와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 돌도끼(石斧), 그물추(漁網錘), 간돌화살촉(磨製石鏃) 등이 출토되었다.

1967년에는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각 대학박물관의 연합발굴이 있었으며 1971 ~1975년 사이에 국립중앙박물관 조사단이 4차에 걸쳐 조사하여, 신석기시대 집자리가 취락을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발굴된 면적은 전체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암사동 유적은 방대하다. 

암사동 유적은 6개의 자연 층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로부터 겉흙층, 검은모래층(백제문화층), 흑회색모래층(청동기문화층), 누런모래층(비문화층), 붉은갈색모래층(신석기문화층)이 있고 바닥은 생토층이다.

신석기문화층은 발굴지역의 전역에서 나타나는데 두께는 40~60㎝ 정도이며 때로는 80㎝ 정도로 두꺼운 곳도 있다.

이층이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된 신석기문화층으로서 유적의 주 문화층이다.

여기에서 문화층은 3개가 있는데 검은모래층은 두께 40~60㎝의 백제시대의 문화층으로서 백제 초기 때의 승석문(繩蓆文)목단지와 이음식독널무덤(合口甕棺墓), 쇠도끼(鐵斧), 쇠못, 불에 탄 건물자리 및 탄화된 목재 등이 나왔다.

흑회색모래층은 두께 20~40㎝의 청동기시대층으로 민무늬토기, 이중구연(二重口緣)토기, 가락바퀴(紡錘車), 돌도끼, 돌끌(石鑿), 청동촉 등이 출토되었다.

 


1983~1984년 조사에서 확인한 신석기 집터는 1975년도 4차 조사에서 확인한 11기에 1기가 더 찾아져서 모두 12기이다.

이 가운데 크기가 매우 작아 일종의 내부시설로 보는 원형 집터 7호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모죽은 네모꼴[말각방형抹角方形]이다.

집터는 모래땅에 움을 파고 지었으며 집터 한가운데에는 강돌(川石)을 둘러 만든 화덕(爐)시설이 있고 집터 한쪽으로 나들이를 위한 계단을 만든 곳도 있다.

출입구는 대개 남향을 하고 있다.

기둥구멍(柱孔)은 한 집안에서 여러 개가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주 기둥과 함께 이를 버텨주는 보조기둥 혹은 이전의 기둥을 갈 때 새로 난 자리가 섞여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집의 크기는 대체로 한 변이 6m 정도인데 이보다 좀 큰 경우 집 안에 선반같은 저장시설이 있거나 6호 집자리(크기 7.9×6.6m)에서 보듯이 내부에 다시 원형의 움이 파져 있는 특이한 경우가 있다.

이는 평양의 남경 31호 집자리, 금탄리 11호 집자리와 유사한데 마을의 공동창고 같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집구조는 네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얹어 지붕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집터 밖에는 저장구덩이, 야외노지, 강자갈이나 깬돌(割石)을 원형·타원형으로 쌓은 돌무지시설(積石施設) 4기가 나왔다.

이들은 한결같이 열을 받은 흔적이 있고 돌무지 아래에는 불탄 흙, 부식토와 함께 많은 목탄이 있으며 돌무지 사이에는 수십 점의 빗살무늬토기들이 출토되므로 토기를 굽던 한데가마(露天窯) 또는 공동의 화덕시설로 추정되고 있다.

신석기문화층의 출토유물로는 빗살무늬토기와 석기가 주류를 이룬다.

그밖에 새뼈와 도토리가 조금 나왔다.

암사동이 대단위취락이며 많은 집터들이 찾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강안단구에 있는 유적의 입지 탓에 유기물은 빨리 부식되고, 강물에 자주 휩쓸려 유물이 매우 적게 출토되는 편이다.

빗살무늬토기는 바탕흙에 활석이나 석면을 섞은 것이 많으며 무늬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무늬는 출토토기의 약 90% 정도가 입술부분의 평행밀집사단선문과 몸체부분의 어골문(魚骨文)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그러나 부위를 가리지 않고 전체를 같은 무늬로 베푼 것도 있다.

또 입술과 몸체의 중간부분에 이른바 종속구연문(從屬口緣文)으로서 점물결무늬(波狀點線文)가 베풀어 진 것도 있다.

이러한 토기상들은 모두 서해안의 궁산 유적과 지탑리 유적에서 보던 것들과 동일하다.

석기는 뗀석기가 주류를 이루는데 도끼, 긁개, 찍개 등이 있다.

또 납작하고 작은 강자갈의 양쪽 끝을 때려내어 만든 그물추도 매우 많이 나온다.

간석기(磨製石器)로는 돌끌이나 창, 화살촉이 있다.

암사동에서는 삼각형과 이른바 역자식(逆刺式) 화살촉이 주로 만들어졌다.

1994년도의 보고서에 의하면 농사용 석기가 다량으로 나온다.

1985년의 보고서에서는 실리지 않았으나 그동안 알려진 암사동의 출토 석기에서 보자면 반달돌칼(半月形石刀), 맷돌, 갈돌(石棒), 갈판(홛石), 괭이, 보습, 돌낫(石鎌) 등이 나오고 있다.

 

도토리



암사동에서 나온 맷돌이나 갈돌 세트는 주로 유적에서 나온 도토리 및 식물채집과 관련지어진다.

그러나 암사동에서는 반달돌칼, 괭이, 보습, 돌낫 등 농사에 필요한 다종다양(多種多樣)의 도구들이 거의 세트로 갖추어져 나왔으며 이러한 양상은 궁산이나 지탑리, 남경 등에서 보는 바와 같다.
 
따라서 암사동과 같은 대단위 취락에서 다량의 채집행위와 함께 농사짓기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할 수 있으므로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시급하다.  

암사동 유적의 방사성탄소연대값은 많으나 6200~3400 B.P. 사이에 들어가는 것으로 나타나며 5000 B.P. 정도가 중심연대로 보인다.

토기무늬의 변천을 이용한 시기구분을 보면 토기의 대부분이 입술·몸체·밑 부분을 구분하여 무늬를 베푼 구분계 전면시문형으로 비교적 이른 시기(신석기 전기의 늦은 무렵)에 속한다고 여겨지고 있다.
 
탄소연대측정값과 형식분류의 관점이 대체로 잘 맞아들고 있어 암사동 유적의 연대는 한국의 신석기시대에서 전기 늦은 무렵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빗살무늬토기와 민토기 사이의 이른바 과도기형 토기의 존재가 거론되며, 이 같은 현상은 바로 이웃한 미사리 유적에서도 드러나고 있음에 비추어 사람들이 암사동에서 신석기시대 이후 지속적으로 살았다고 볼 수 있겠다.

참고문헌
암사동Ⅱ(국립중앙박물관·서울특별시강동구, 1999), 암사동(국립중앙박물관, 1995), 암사동(국립중앙박물관, 1994), 암사동(서울대학교박물관, 1985), 암사동유적 긴급발굴조사보고(암사동 유적발굴조사단, 1983), 암사동 신석기시대 주거지조사(이백규, 한국고고학연보 3, 1976), 서울 암사동 선사취락지(김종철, 한국고고학연보 2, 1975), 암사동 강안유적 발굴보고(김광수, 역사교육 13, 1970)

 

생도토리





구분 유적
사전명 한국고고학사전(2001)
 
신석기시대편
암사동유적(서울 岩寺洞遺蹟)

설명
사적 제267호. 서울시 강동구 암사동 153-157 일대에 위치한다. 한강변 자연 제방상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신석기시대의 마을유적으로서는 가장 대규모에 속하며 주거지와 함께 야외 화덕자리, 많은 양의 빗살무늬토기와 각종 석기 등이 확인된 대표적 신석기시대 유적이다. 

암사동유적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에 많은 양의 유물이 노출되면서 일본인 학자 요코야마[橫山將三郞]의 지표조사에 의해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국내 학자들에 의해 소규모의 발굴조사나 지표조사 등을 통해 유적의 성격이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다. 

고려대학교 김정학에 의해 1960∼64년에 걸쳐 6회의 지표조사와 간단한 시굴이 이루어졌고, 1968년에는 한국대학박물관협회가 주관한 국내 최초의 대학연합발굴이 이루어졌으나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에 의해 조사된 구역만 보고가 이루어져 2기의 주거지가 보고되었다. 
 
1971년에서 1975년에 걸쳐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본격적인 대규모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암사동유적이 대규모의 신석기시대 마을유적임이 분명해지게 되었다. 1971년에 주거지 8기, 1973년에 주거지 1기, 1974년에 주거지 6기, 1975년에 주거지 11기와 적석유구 1기가 조사되었다. 

이러한 조사 성과에 힘입어 1979년 암사동유적은 사적 제267호로 지정 되었다. 

이후 유적공원을 조성함에 따라 다시 1983년과 1984년에 긴급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이때 2기의 주거지가 새로이 조사되었다. 

1988년 공원조성과 함께 유물전시관도 건립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거지 소굴 암사동



1998년 전시관 확장에 따른 조사에서도 3기의 주거지가 추가로 조사되었으며 이후 암사동유적 관리계획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조사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암사동유적에는 지표 아래 크게 3개의 문화층이 존재하고 있다. 제1문화층으로 불리는 최하층은 신석기시대에 해당된다. 

여기에서는 현재 총 30기 가까운 주거지가 조사되었는데, 아직 조사되지 않은 지역의 면적까지 고려하면 암사동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주거지가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제2문화층은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확인된 바 있으며 최상층에 해당되는 제3문화층에서는 6각형 주거지 등의 삼국시대 백제 유구와 유물이 출토되어 암사동유적은 신석기시대뿐 아니라 역사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사람들에 의해 점유되어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암사동유적에서 지금까지 조사된 신석기시대 주거지는 총 33기인데, 평면형태는 말각 방형이나 원형을 띠고 있으며 방형이 우세하다. 

규모는 평균적으로 원형보다 방형이 큰 편이다. 기둥은 뚜렷한 경우는 4주식이 확인되는데, 집의 네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도리를 얹은 후 그 위에 서까래를 걸친 형태로 추정되며 이럴 경우 집은 밖에서 볼 때 원뿔형이나 사각뿔의 형태를 하게 된다. 
 
주거지 중앙에는 노지(爐址)가 있는데 할석이나 천석을 돌린 위석식으로 평면 원형과 방형이 있다. 대체로 주거지 평면형태와 노지의 평면형태가 일치한다. 

75-2호주거지에서는 노지의 남쪽에 토기를 거꾸로 박아놓은 시설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시설은 북한지역의 온천 궁산, 봉산 지탑리, 평양 금탄리 유적 등에서 이미 발견된 바 있는데 중서부지역 신석기시대 주거지의 독특한 시설이다. 

이 시설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불씨나 곡물, 도구 등을 저장, 보관하기 위한 시설로 생각된다.

암사동유적에서는 매우 많은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대부분은 토기와 석기들이다. 

토기는 크기와 관계없이 대부분 첨저의 포탄형을 하고 있다. 소형토기 등에서 평저가 보이지만 소량이다. 

이 토기들에는 거의 전면에 걸쳐서 문양이 가득 새겨져 있는데, 부위별로 서로 다른 문양을 시문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구분계 빗살무늬토기라고 불린다. 

 

거지촌 암사동


 
구연부에는 주로 단사선문을 눌러서 시문하였고 조문이나 점열문, 격자문 등도 확인된다. 

동체부에는 종주어골문이나 횡주어골문을 침선으로 새긴 것이 대부분이다. 

횡주어골문에는 단치구와 다치구로 시문한 것이 있는데, 다치구로 시문한 횡주어골문은 문양 단위가 크고 찰과상으로 얕게 시문되었으며 저부문양이 생략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다치구에 의한 찰과상 횡주어골문은 한강유역을 포함한 중부지역에서만 국한되어 확인되는 것으로 대동강유역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외에도 동체부에는 능형문, 점열 타래문 등 여러 형태의 문양이 시문된다. 구연과 동체부 사이에는 중호문이나 격자문 등 다양한 문양을 채워넣기도 한다. 
 
저부는 횡주어골문, 사선대문, 방사상문 등으로 시문하였다. 이와 같이 토기의 전면에 문양을 가득 채워 넣은 것이 암사동 빗살무늬토기의 큰 특징이자 한강유역 신석기시대 토기문양의 특징이다. 

물론 전면을 찰과상 횡주어골문으로 시문한 동일계토기나 토기의 가운데 부분이나 아랫부분에 문양을 그려 넣지 않고 비워두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아예 문양을 새겨 넣지 않은 것들도 있지만 소수이다. 

토기 이외에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은 식량을 얻거나 생활재료들을 가공하는데 사용되었던 석기들이다.

석기는 크게 용도에 따라 식량 획득용 도구, 벌채, 목공용 도구, 굴지구, 식량처리용 도구, 공구 등으로 나누어진다.

식량획득용 도구는 석촉, 창, 그물추, 채집에 사용되었을 굴지구(堀地具) 등이 있다. 

암사동유적에서 나온 석촉은 단면 렌즈상의 무경양익촉이나 단면 편육각형의 삼각촉 형태로 모두 마제이다. 

창 역시 갈아서 만들었다. 그물추는 작은 강돌을 골라 양쪽 끝을 깨트려 홈을 만든 일반적 형태이다. 

그물추를 통해 그물어로의 존재를 알 수 있지만 암사동유적에서는 동물뼈가 남아 있지 않아 어떤 물고기를 잡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다만, 강변에 위치하고 있는 점, 다른 유적의 예 등을 고려하면 주로 잉어나 붕어 등을 잡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물추는 매우 많은 양이 출토되기 때문에 당시에 물고기 잡이가 매우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열매나 뿌리를 먹는 식물 등의 채집에는 특별한 도구가 필요 없어 채집용의 도구로 확정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다만 뿌리를 먹는 식물의 경우는 땅을 파야하므로 굴지구는 채집용 도구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암사동유적에서는 채집의 대상이 되었던 것들 중에서 도토리 열매가 발견된 바 있다. 

 



도토리는 참나무과 열매의 총칭으로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도토리가 전국적으로 분포하기 때문에 당시에는 매우 유용한 먹을거리였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여러 유적에서 도토리가 많이 확인되었고, 남부지역에서는 도토리의 저장구덩이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농경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굴지구로 따비형석기 및 괭이형석기가 다량 확인되었고 수확도구로 생각되는 낫이 발견된다. 

따비형석기는 보습으로도 불리는 것으로 지탑리유적의 것과 비교했을 때 대부분 소형에 해당된다. 

괭이형석기는 대부분 타제로 제작되었고 폭이 좁은 장조형이다. 

낫은 마제와 타제가 모두 보인다. 
 
이러한 유물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놓은 것으로 보아 암사동유적 주민들은 수렵·채집·어로 이외에 초기농경을 병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암사동유적에서 실제 곡물은 출토되지 않았지만 주변 유적들의 예를 보면 신석기시대에는 주로 조와 기장을 재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황해도 봉산 지탑리·마산리, 경기도 시흥 능곡동 유적, 부산 동삼동패총 등에서 실물로 조나 기장이 확인되고 있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식량을 가공 처리하는데 사용되었던 도구로는 갈돌과 갈판, 고석이 있다. 

봉상 갈돌과 말안장형 갈판이 기본적인 형태이다. 거의 매 주거지마다 확인되고 있는 기본 도구 중 하나이다. 
 
식량의 획득과 가공, 조리에 사용된 도구 이외에는 벌채 목공용의 각종 합인석부와 단인석부, 대팻날, 석착 등이 다량으로 출토된다. 

암사동유적에서는 전면마연석부도 있지만 인부만을 마연한 합인과 단인의 석부류들이 더 많다. 

합인석부는 횡단면 원형이나 타원형, 렌즈형 등이 일반적이고 지탑리나 궁산 유적에서 보이는 사릉부(四稜斧)는 확인되지 않는다.
 
암사동유적은 오래전부터 중서부지역 신석기시대 이른 시기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알려져 왔다. 

대동강유역과의 대비를 통해 궁산1, 2기와 병행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다. 
 
그런데 암사동유적에는 대동강유역에는 보이지 않는 다치구에 의한 찰과상 횡주어골문이 가장 많이 존재하고, 궁산3기에 해당하는 금탄리1식토기가 확인되는 등 유적의 존속 시기를 단순히 궁산1, 2로만 한정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최근에는 암사동유적이 전기 후반부터 중기에 걸쳐 존속했던 것으로 보려는 시각이 늘어나고 있으나, 암사동유적 내에서 층위적으로 이를 분리하기가 어려운 점이 문제가 된다. 

최근 주변지역에서 암사동유적보다 단순한 구성을 보이는 토기상이 확인되는 취락유적의 조사가 증가하고 있으므로 암사동유적의 편년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연대는 기원전 4000∼3000년 사이가 많으나 기원전 4000년을 넘어서는 연대와 2000년대로 떨어지는 연대도 일부 있다. 

암사동유적은 명실공히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첨저의 빗살무늬토기문화가 가장 먼저 출현한 지역이 암사동을 포함한 중서부지역이라는 점에서 첨저 빗살무늬토기문화의 등장과 확산을 이해하는데 암사동유적은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가 된다. 

신석기시대 주거지와 취락의 전개과정을 이해하는데도 역시 암사동유적은 중심적 역할을 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암사동유적으로 대표되는 중부지역의 빗살무늬토기문화가 동쪽과 남쪽 대부분 지역의 신석기문화의 토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토기의 문양이나 형태, 주거지의 형태 등으로 볼 때 동해안이나 남부지역의 신석기문화는 중기가 되면 암사동유적과 같은 중부지역 문화의 영향을 받아 문화가 크게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와 함께 곡물의 재배와 같은 새로운 기술과 생업방식도 같이 확산된다. 

즉 중서부 이남의 신석기문화 전반에 걸쳐 암사동식의 생업방식과 문화가 확산되고 정착되는 것이다. 

암사동유적은 이러한 점에서 한반도 중서부 이남 지역의 신석기시대 문화상을 이해하는데 핵심이 된다.(임상택)

참고문헌
암사동 I∼V(국립중앙박물관, 1995·1999·2006·2007·2008)
구분 유적
사전명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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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중요하다는 신석기시대 표지 유적과도 같은 암사동 선사유적 한국고고학사전 두 가지 종류 기술이라

한국고고학이 왜 망조인지를 이리도 적나라히 보일 수는 없다.

토기 타령 집구조 타령 도토리 타령 삼타령 합작하다 끝났다.

채집? 도토리 채집했다고 채집?

웃기고들 있다.

도토리는 주식일 수 없다.

조 수수 기장이다.

이 이야기를 제대로 풀어가야지 언제까지 도토리 타령만 일삼을 작정인가?

 

*** previous article *** 

 

[독설고고학] 가축 사육, 특히 여물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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