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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수연壽硯 박일헌朴逸憲, 그 뒤의 이야기

by 버블티짱 2021.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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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근대기의 서화가 수연 박일헌, 호운湖雲 박주항朴疇恒 부자父子에 관한 포스팅을 한 적이 있다.

 

근대 화가 박일헌朴逸憲과 박주항朴疇恒 부자父子, 신문에서 그 행적을 찾다

<옛날 신문을 읽다가> 저번에 호운湖雲 박주항朴疇恒이란 화가 이야기를 잠깐 했었는데, 오늘 다른 일때문에 옛날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그의 개인사를 약간 찾게 되었다. 일단 그는 함경북도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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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천군읍지》에서 찾은 수연 박일헌 흔적

<출근길 단상> 1. 지난번에 언급했던 수연 박일헌에 관한 기록을 <명천군읍지> 음관조에서 간신히 찾았다. 밀양 사람이고, 아간 사창포에서 살았으며, 관직은 주사, 경원군수, 장진군수에 이르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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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난초로 당대에 이름을 얻었던 인물이었지만, 어떻게 된 게 지금까지도 그들을 제대로 조명한 일이 많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우연한 기회가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그 둘을 추적하는 일이 없었을지 모른다.

박주항의 아버지, 박일헌이라는 인물은 어떤 이였던가? 막상 찾아보니 그를 다룬 기록이 생각보다는 꽤 있는 편이었다. 지난번 포스팅에 덧붙이자면 경원慶源 군수를 지낸 1880년대 박일헌의 행적 하나가 엉뚱한 기록에서 확인된다.

경상북도 예천 맛질이란 곳에 살았던 박주대(1835-?)란 분이 기록한 <나암수록羅巖隨錄>이란 책을 보면

"함경북도 경원 군민이 본사[아마 박주대가 보았던 신문의 신문사인 듯]에 편지를 보내 본군의 군수 박일헌을 칭송하니, (그는) 돈을 내어 폐단을 구제하고, 표호漂戶와 재호災戶를 구원하였으며, 물에 빠져 죽은 이를 거두어 묻어주고, 죽은 소[원문: 牛斃]에게 은혜를 베풀고, 성을 쌓는 데 민력을 들이지 않았으며, 문묘를 받들어 돈을 내어 획부劃付하고 열흘에 한 번 문제를 내어 유생에게 시험을 치도록 권면하고, 청나라 비적에게 노략질당한 백성을 보호하고[원문: 保護淸匪倉掠之民] 가난한 백성을 진휼하였으며, 강가의 강둑을 수축하였다."

고 한다. 매관매직이 일상이었던 당시의 다른 지방관에 비하면 제법 실무형 인재였고, 이 정도면 꽤나 선정을 베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그는 대한제국기 유명한 애국계몽운동 단체였던 서북학회의 일반회원으로 가입했던 적이 있다(<서우西友> 제16호, 1908년). 명단의 순서를 보면 박은식(1859-1925), 이준(1859-1907), 김달하(?-1925), 유동열(1879-1950) 같은 쟁쟁한 인물들 다음가는, 49번째이다. 수백 명이 넘었던 서북학회 회원 중에서도 위치가 꽤 높았던 셈이다. 이때 그는 전라북도 부안 군수였다.

그리고 그는 1910년대 부안 군수 자격으로 조선농회朝鮮農會 전북지회 상의원商議員을 역임한 적이 있다. 조선농회는 "일제가 조선농민을 착취하기 위해 설립한 농촌단체로, 농촌진흥운동을 촌락단위의 전면에서 추진한 관제조직"(<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친일인명사전>에도 실려있었다. 여기에 따르면 그는 1914년까지 부안군수를 역임하고, 두 차례에 걸쳐 일제의 기념장을 받았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의 생년을 1860년으로 적고 있다. 앞서 포스팅에서는 1934년 5월 74세를 일기로 장서長逝하였다는 신문기사를 근거로 박일헌을 1861년생으로 추정했는데, 생일까지 적고 있는 걸 보면 이쪽이 더 근거가 있지 않을까. 단 아래의 참고문헌 중 어디에 실린 이야기일지는 아직 모르겠지만(아마 <신사명감>이겠다).


1911년 9월, 부안 군수 박일헌은 조선총독부로부터 견책을 받는다. 왜? 1월 15일 부안군 남상면장 허동순이라는 사람이 숙직하는 이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군청에 침입, 토지조사서를 고친 사실이 적발되었기 때문이다. 한창 토지조사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던 시점이니 있을 법한 일이긴 한데, 평소 아랫사람 단속에 부주의하고 근무에 태만했다는 죄목으로 총독부는 문관징계령文官懲戒令에 의거, 박일헌 군수를 꾸짖고 그 내용을 관보에 실어 만천하에 공개해버렸다. 제대로 망신당한 박 군수, 그 심정은 어땠을지? 견책의 내용은 어떤 것이었을지 궁금한데 감봉 정도였으려나. 분명한 건 짤리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박일헌의 견책 소식이 실린 1911년 9월 9일 조선총독부관보


박일헌이 죽은 다음 해인 1935년 11월, <조선총독부관보>에 그의 이름이 한 차례 더 실린다.

임야조사위원회 공문 공시公示 제73호, 함경북도 명천군 아간면 고점동 산183-2에 있던 임야의 소유주인 아간면 용호동 박일헌의 상속인 박주풍朴疇豊이라는 이가 등장한다. 이를 보면 박일헌에게는 아들이 최소한 둘 있었고, 박주항은 아마 둘째아들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게 했던 것은 아닐지?

박일헌의 상속인 박주풍의 이름이 실린 1935년 11월 27일 조선총독부 관보. 근데 글씨체가 24년 전 관보와 똑같다.


최근 박일헌의 난초그림 한 점을 보게 되었다. 67세 작이라니 1926년 언저리 작품인데, 언뜻 든 느낌은 소호 김응원(1855-1921)과 해강 김규진(1868-1933)을 잘 버무려 만든 겉절이 같달까. 대가大家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괴석에 난 두 촉을 앉힌 구도로 보나 획의 뻗침과 꽃대를 올린 솜씨로 보나 적어도 하수下手 아닌 상당한 수준이다.

아쉽다면 먹의 농담 변화가 별로 없어서 뻣뻣하고 좀 답답한 느낌이 강하다는 점인데, 아들의 난초보다는 확실히 호방한 맛이 있다. 지난번에도 말했었지만, 글씨를 보면 아마 소호에게서 배우지 않았을까 싶은데 둘의 접점을 알 수가 없다. 화제를 읽어 보니 난을 기르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법한 내용이다.

난초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을 생기게 하니
비유컨대 불가의 다정보살多情菩薩과 같아서
정이 깊어지면 수명 또한 길어지니라.
67세 수연거사가 짓노라

蘭之使人情生
比之如禪家多情之菩薩
所以情長壽亦長
壽硯六七居士 作


조만간 그와 관련된 몇몇 자료를 보충해서 올리고자 한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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