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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아버지 장송도 하기 전에 장가 간 화원 김명국

by taeshik.kim 2022.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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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대전을 읽다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라고 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분이 많을 줄로 알지만, 그를 빼놓고 조선 중~후기 역사를 논할 수 있을까? 이는 정치사나 학술사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가 남긴 글을 읽어보면 여러 방면에 걸친 꽤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실려있다.

<송자대전宋子大全> 권33에 실린 편지 한 통도 그에 속한다.

1659년 시남市南 유계(兪棨, 1607~1664)에게 보낸 글이다.

이때 송시열은 이조판서(지금으로 치면 행정안전부 장관?)였고 유계는 병조참지(지금으로 치면 국방부 국장?)였다.

...

또 한 가지 일이 있네. 저번에, “북부北部에 윤리倫理를 거스른 사람이 있는데도 부관部官이 적발하여 보고하지 않았으니, 이는 직책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라 한 말을 듣고, 그 허실虛實을 알고자 하여 북부 관원을 불러 물었더니, 이튿날 북부에서 나와 하는 말이, “북부에 있지 않고 실은 중부中部에 있었는데 이미 잡아다가 사헌부司憲府에 고발했사옵니다.”라 하였는데, 이번에 또 들으니 윤리를 거스른 자가 또 중부에 있다고 하여 오늘 중부 관원들을 불러 저번 일의 태만을 말하고 이번에 노력할 것을 책망하니, 주부主簿는 답변을 하지 못하고 참봉參奉이 곁에서 대신 자세히 답변하기에 내가 주부에게, “앞으로 이번 일의 처리 여하를 보아 상벌賞罰이 있을 것이야.”라 하였네. 그가 나간 뒤에 여러 관원들이 모두 ‘직책에 맞지 않는 사람인 듯하다.’고 했는데, 유독 이석(貳席; 차석 관원)이 빙긋이 웃으며 ‘이 사람은 실은 아무개의 동서同壻이외다.’고 하므로, 내가 비로소 그 주부가 형의 동서임을 알았네.


...

얘기인즉슨, 한성부 중부에 사는 누군가가 '윤리를 거슬렀는데도' 그 동네 관원들이 상부에 제대로 보고를 하지 않고서 뭉개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사실이 하필 우암의 귀에 들어갔고, 판서 대감 우암이 한성부 관원들을 불러다가 한소리를 했다.

한데 별달리 말을 못하고 땀만 삐질삐질 흘리던 한성부 중부 주부(종6품)가 우암과는 각별한 시남의 동서라는게 아닌가.

우암이 좀 민망하기도 하고 일을 확실히 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남에게 이 편지를 써서 해명 겸, 부탁을 했던가보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을 읽어보면....

...

소위 중부의 윤리를 거스른 사람이란, 감토전甘土廛 행랑 뒤에 사는 화원畫員 김명국(金命國, 1600~?)으로서 아비가 죽어 장사도 하기 전에 아내를 맞이한 자이니, 모름지기 이를 근거로 탐문해서 사헌부에 고발하도록 하는 것이 어떤가. 하나하나 다 말하지 못하네.

'감토'가 뭔지 잘 모르겠다. '달콤한 흙'이라...흙으로 떡이나 밥을 지어 먹기도 했다는 얘기에 비추어보면 그럴 용도로 특별히 만든 흙인가? 그게 '전' 곧 행랑을 갖춘 시전에서 팔 정도면 꽤나 수요가 있던 물건이었던가 보다.

ㅡ> 존경하는 기호철 선생님이 답을 주셨다. '감토'란 우리말 '감투'의 음차란다. 말총으로 엮어 만든 탕건, 또는 관리들이 쓰는 사모紗帽를 가리키는 그 감투 말이다.

그렇게 보니 이해가 된다.

그런데 그 행랑 뒤에 살던 이가 '화원 김명국'이었다. 그 유명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달마도>를 그린 바로 그 연담蓮潭 김명국이다.

그가 부친상을 마치기도 전에 아내를 맞이하여 '윤리를 거슬렀다.'

연담은 1600년생으로 알려져있다. 우암보다도 7살 연상이니 이를 생각하면 재취再娶일텐데, 뭐가 그리 급해서 아버지 상도 치르기 전에 부인을 맞이해야 했을까.

그는 1636년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갈 때 인삼을 밀매하려고 하다 적발되어 처벌받은 적이 있다.

<달마도>를 보아도 그렇고 그의 다른 작품을 봐도 뭔가 기행奇行을 많이 했을 것 같은 분위기이긴 한데, 이것도 그 기행의 일종이었을까.

더 이상의 기록이 없어서 김명국이 왜 그랬는지, 처벌을 받기는 했는지 등등은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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