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에 집착한 인물로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같은 사람을 찾기 힘들다.
그가 그린 우연은 모두가 비극이다.
우연이 초래한 파국은 비극 투성이다.
이를 더 쉬운 말로 운빨이라 한다.
하지만 운빨은 내가 곡해한지 모르나 우연이 초래하는 축복이다.
대통령을 지낸 이명박이 한 말이다.
"제아무리 노력해도 운빨 따르는 사람은 이길 수 없다."
파국에 이르고서야 우연을 돌아다 본다.
그때 이 말만 하지 않았어도,
그때 이런 일만 있지 않았어도,
이런 따위로 과거를 곱씹는다.
스스로 자책하기도 하고
남한테 모든 탓을 돌리기도 한다.
그 우연이 충돌할 때 비아냥과 삿대질과 분노가 싹트는 법이다.
그러면서 이르기를 이게 다 네 탓이라 한다.
그러면서 과거를 곱씹어 보니 네 탓 아닌 게 없더라.
이 네 탓 타령이 오가는 사이
어쩌면 우연이 빚어주었을런지도 모르는 과거의 행복까지 모조리 비극으로 발전한다.
그리하여 남는 것이라곤 원한과 분노밖에 없다.
뒤렌마트 원작인지 기억에 확실치 않으나 아이까지 낳고 알콩달콩 두 사람이 잘 살다가 파국으로 치닫는 영화가 있다.
제목도 줄거리도 기억나지 않는다.
내게 남는 기억이라곤 오직 이거 하나였다.
파국을 맞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 과거의 부부가 만나 어쩌다 과거사 논쟁을 벌인다.
왜 우리가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는지를 따지는 장면이다.
한데 그 비극의 씨앗이 꼴랑 이 한마디였다.
"내 아이[my baby]"
이 한 마디에 상처받은 한 사람은 결국 떠난다.
물론 갈등이 고조한 상태서 저 말은 불에다 기름은 얹은 꼴이기는 하다.
그에 의하면 저 말은 이러해야 했다.
"우리 아이[our baby]"
당신 그때 왜 우리 아이라 하지 않고 내 아이라 했느냐고 따진다.
우연은 비극일 수밖에 없다.
상대가 저 말을 할 수밖에 없던 필연의 곡절이 있었다.
그 곡절이 드러나면서 영화는 끝난다.
짙게 여운이 남는다.
내 말 한 마디 내 행동 하나가 저런 파국을 빚지 않았다 어찌 장담하리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저러고 있는지 모른다. (2016. 8. 6)
***
우연이 파국을 빚는 까닭은 주석footnote이 없기 때문이다.
주석 없는 선언이 때론 여운이 되기도 하지만 그 여운은 물들지 아니한 리트머스 시험지 같아
이런 색깔도 나고 저런 색깔도 난다.
여운이 짙은 반향을 일으킬 때는 오직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고맙다요
다른 하나는 미안하다는 말이다.
이 고마움과 미안함은 참 하기 쉬운 말이나 안해서 관계가 파탄난다.
어찌 기쁨이 나 혼자만의 기쁨이겠으며
어찌 미안이 혼자만의 미안이겠는가?
그가 아프듯 나도 아픈 법이요 내가 아프면 그도 아픈 법이다.
이 아픔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치유하는 법은 오직 미안해함이 있을 뿐이다.
그 미안해함은 모름지기 서로에 대한 것이어야 하며 일방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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