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외 발행날짜가 안 보여 안타깝다.
1925년 을축년대홍수는 단군조선 이래 한반도가 경험하지 못한 미증유의 대란大亂이었으니
아마도 빙하기가 끝날 무렵 한반도 지형을 바꾸었을 그 시대 격변을 능가했으며
곧이어 전개될 한국전쟁의 그것도 이에는 미치지 못했다.
저는 여러모로 한반도사 획기였으니,
그 이전에도 있기는 한 구호사업의 혁명을 불러왔으며
그 타개를 위해 공공사업을 시작했고
국토 개조 사업 근간을 바꾸었으며
무엇보다 대중매체 시대로의 완전한 전환을 알린 신호탄이었으니
막 이 땅에 피기 시작한 언론출판문화 역시 혁명을 불러와서
참사는 곧 돈이 되는 시대라
이 참사는 각종 화보로 제작 배포되었으니
그 선두에 신문사들이 앞장섰다 하나,
조선총독부 역시 묵직한 화보집을 만들어 조선을 홍보하는 호재로 쓰기도 했더랬다.
저 호회 경쟁을 정리한 단편 하나가 있다. 그 한 구절에 이런 말이 있다.
신문사들도 앞장섰습니다. 1차 홍수 때 동아일보는 제작을 맡은 6, 7명을 뺀 전 사원들로 4개 반을 편성해 현장으로 출동하거나 실태 파악을 했죠.
2차 홍수 때는 시대일보-이촌동, 조선일보-뚝섬, 동아일보-마포로 지역을 나눠 구호에 나섰습니다. 그래도 경쟁은 멈추지 않았죠.
조선과 동아는 홍수소식을 시시각각 호외로 전했습니다. 누가 더 빨리 호외를 찍어내느냐로 불꽃이 튀었죠.
그러다 호외가 뚝 그쳤습니다. 정전이 되는 바람에 윤전기가 멈췄거든요.
그런데 조선은 이내 다시 호외를 냈습니다. 꾀 많은 이상협이 석유 발동기를 미리 준비했거든요.
이를 뒤늦게 안 동아일보 편집국장 설의식은 분을 참지 못해 윤전기를 붙들고 대성통곡했습니다.
우리 신문업계에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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