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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이강승이 회고하는 춘천 중도 발굴

by taeshik.kim 2024.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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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부가 북한강으로 지표조사를 나간 것은 1977년 5월 초순이었다.

당시는 적은 인원으로 예산에 잡혀 있는 두 건의 발굴조사를 감당할 길이 없어 금강유역의 발굴조사는 송국리 집자리를 대상으로 하고 한강유역은 지표조사로 발굴사업을 대치하기로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손 모자라는 것은 변함이 없어 강인구 선생(당시 고고과장)은 일본 유학 중이고 사무실에는 30대 초반의 이백규(현 경북대) 이건무(현 고고부장) 한영희(현 전주관장) 제씨와 필자, 그리고 홍영선(호림박물관)씨가 전부여서 가능한 한 일을 덜 만들고 밀린 보고서를 써야겠다는 것이 당시의 현안 목표였다.

이백규 교수, 필자와 제도실의 윤희원(현재 설계사무소 근무)씨가 배낭을 메고 춘천을 향해 떠났는데 오월인데도 강원도의 날씨가 유달리 무더웠다.

춘천을 중심으로 소양댐과 의암호, 파로호 아래의 작은 냇가와 골짜기를 걸어서 누비고 다녔다.

지표조사는 아무리 열심히 다녀도 못 찾으면 그만이고 그것으로 없는 것을 확인한 결과를 얻는 것인데, 당시는 못 찾으면 일하기 싫으니까 베낭 메고 놀다 왔다고 남들이 색안경 쓰고 볼까 두려운 마음에 그저 별 가망도 없는 지역을 부리나케 헤메고 다녔다.

아직도 문화재나 유물에 대해서는 일반인의 인식이 낮았고 군부대가 많은 지역이라 수상한 용의자로 물려 곤욕을 치루지나 않을까 늘 조심했는데 이 교수는 수염도 깍지 않은 채 까만 안경을 쓰고 다녀 불안한 생각이 가시지 않았다.

며칠을 헤메다가 어느날 의암호안의 중도라는 섬에 가기로 하였는데 마침 안춘배(당시 문화재연구소 근무)씨를 만났다.

중도를 다녀오는 길인데 유적을 찾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실망을 했으나 좋았던 시절의 미군 방갈로도 있다 하니 구경가자고 통통배를 타고 건너갔다.

별 기대 없이 섬을 한바퀴 돌았는데 말 무덤이 있는 남쪽으로 내려가니 강가에 뜻밖에도 민무늬토기편이 자갈만큼이나 많이 깔려 있었다.

너무나 좋은 수확에 정신차리고 자세히 살펴보니 섬의 이곳 저곳에서 토기편 등을 볼 수 있었고 단면에서 두꺼운 숯층을 확인하였으며 허물어진 고인돌도 찾았다.

맞은편의 단애에서도 포함층이 보이고 상당히 떨어진 신매리에서도 유적의 징후가 보여 매우 넓은 지역에 유적이 분포한 것을 알았다.

이렇게 해서 중도 일대의 유적이 고고학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는데 만약에 수면이 올라왔던 때에 중도에 갔더라면 안 선생처럼 헛수고를 했을 것이었고, 그랬다면 언제쯤 학계에 얼굴을 드러냈을지 모를 일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의암에서는 수시로 댐의 물을 조절하였음으로 수면의 변화가 심하였다.

소양댐 아래의 지내리에서는 댐 막을 때 흙을 파낸 자리에서 엄청나게 많은 토기편들을 찾았는데, 모르고 한 일이지만 유적파괴의 정도나 범위가 목불인견이었다.

한번은 댐 아래 강 가운데 자갈밭에서 버너에 밥을 짓고 있는데 갑자기 수면이 높아졌다. 댐 바닥의 물이 빠른 속도로 올라와 조금만 방심하였더라면 내려갈 뻔하였다.

물이 너무 차가와 헤엄도 소용없이 심장마비로 죽을 판이었는데 그걸 두고 이 선생은 일부러 죽을 곳에 끌어 넣었다고 두고두고 시비를 걸었다.

보름 후에 돌아왔을 때는 더위와 기근에 못 이겨 검은 얼굴에 눈알만 번득였다.

최순우 관장님께 인사를 드렸더니 보시기에 딱했는지 성북동 댁에 초대하여 주연을 베풀어 주셨는데 마침 젊은 일본 손님과 학교로 옮기신 김종철 교수가 동석했다.

뒷곁에서 메마르고 빈 속에 양주 몇 잔을 받아 마시고 보니 이 교수와 필자는 식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벌써 절반은 혼이 나간 상태였다. 

전골이 들어와 막 식사를 하려는 판에 이 교수가 일어서다가 실수하여 그만 마주 앉아 계시는 최 관장님께 상을 엎고 말았다. 

취중에도 예삿일이 아니다 싶어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온통 음식이 흘러내려 그 황당한 상황은 말씀이 아니었다.

정신이 좀 멀쩡한 이건무, 한영희씨와 함께 평창동 신혼댁으로 인사불성의 이 선생을 부축하여 데려 갔는데 얼마나 무겁게 늘어지는지 셋이서도 감당치 못할 정도였고, 급기야는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찧어 바지가 찢어졌다.

돌아 나오다가 셋이서 사이다 한잔을 미시며 한숨을 돌렸다.

조금만 조심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내일 관장님을 어떻게 뵐 것이며 또 점잖은 손님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참으로 난감하고, 회한과 후회로 가득찬 초여름 밤이었다.

이튿날 아침 넷이서 서로 등을 밀며 관장실에 들어가서 기여 드는 목소리로 사죄를 하였는데 늘 그러하시듯 허물을 젊은 탓으로 덮어두시고 너그럽게 맞아 주셨다. 차라리 야단맞는 것이 마음 편할 것을.

다투어 방을 나와 퇴근을 기다려 두 장본인은 막 나오기 시작한 딸기 한 상자를 사 들고 성북동 사모님께 빌러 갔는데 대문을 열어 주신 사모님 얼굴을 뵙자 염치가 없어 꾸러미만 넘겨 드리고 얼른 돌아 나왔다.

그 후론 술 마시면 취하지 말아야겠다고 단단히 결심 했지만 몇 번이나 필름이 끊어진 적이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이 선생은 자기가 취한 것을 말리지 않았다고 나무랐고, 심지어는 평창동 골목에서는 길거리에 일부러 내팽개쳤다고 우겨댔다.

진실은 과연 밝혀질 것인지 안타깝기만 하다.

그 후로 한두 번 남한강 유역을 조사하고 중도에 첫 삽을 댄 것은 80년 7월이었다.

이 선생은 대학으로 가고 이건무씨는 결혼을 앞두고 있던 처지이고 한영희씨는 일본 출장 중이라 부득이 필자가 발굴책임을 지게 되었는데 처음 맞는 책임이라 여간 어깨가 무겁지 않았다.

김재열, 김정석(현재 호암미술관)씨와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이남규씨의 도움을 얻어 무더위와 씨름을 하면서 조사했다.

얼마나 날씨가 뜨거웠는지 햇볕에 타서 생긴 검은 점들이 아직도 어깨에 남아 있다.

모두 젊고 의기가 투합해서 즐겁게 지냈고, 일이 끝나면 맞은 편 강가에 나가 목욕을 하였는데 보는 사람이 없어 벌거벗고 물장구치며 석기시대의 수영을 즐겼다.

돌아오는 길에 밭에서 저절로 익어 터진 수박을 커피 한잔 값도 못 되는 돈을 치루고 한 덩이씩 안고 돌아와 밤 늦도록 놀이를 즐기면서 먹어치우곤 하였다.

그렇게 싱싱하고 단 수박은 다시 못 먹을 것이다.

그때는 춘천에 발굴이 생소하여 초반에 토기편들이 나오자 신문과 TV에서 크게 다루어, 약국에 갔더니 얼굴을 알아 보고 싼 값에 모기향을 주었다.

도청의 심용섭 연구관은 모든 일에 발벗고 나서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다음 해에는 상류쪽 산매리를 조사하였다. 발굴 도중 인부들과 보신탕 잔치를 하였는데 그 때문인지 유달리 유물이 나오지 않아 크게 후회하였다.

그 후로 필자는 지방으로 내려가서 고고부에서 세 번을 더 조사하였다.

그 이후에는 다른 여러 팀들이 참가하여 활발한 조사가 이루어져 북한강유역의 문화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출처 국립박물관 박물관신문 제243호 (199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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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춘천 중도 유적 발굴, 개판 발굴을 폭로하다
 

사진전을 염두에 둔 순간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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