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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초장草葬과 초분草墳, 가난한 사람들의 장례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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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29 17:25:18
국립민속박물관 '초분'(草墳) 조사보고서 발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조선후기 때 학자 정약전(정약용의 형)은 최근 발굴된 당시 소나무 정책에 대한 통렬한 논문 「송정사의」(松政私議)에서 남벌에 따른 산림파괴가 불러온 사회현상 중 하나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400~500냥에 달하는 관재(棺材)는 도회지 양반 권세가만이 쓸 수 있지, 궁벽한 시골 평민은 태반이 초장(草葬)으로 장례를 치르고 있다".


 

 

 

 

이를 통해 시체를 매장하지 못하고 야외 풀섶에다가 시신이 썩을 때까지 내어 두는 소위 초장(草葬)이 왜 유행했는지, 그 원인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이런 매장 풍습을 '초분'(草墳)이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엄밀히는 '분'(墳)이란 흙 토(土)가 뜻을 의미하는 부수에서 들어가 있는 데서 엿볼 수 있듯이 땅 속에 매장하지 않는 경우에는 쓰기 곤란한 말이다.

 

실제로 야외매장 풍습을 옛 문헌자료에서는 초빈(草殯)·고빈(藁殯)·출빈(出殯)·외빈(外殯) 등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다소 의외겠지만. 초장 혹은 초분이 아직도 일부지역에서는 남아있다.

 

국립민속박물관(관장 김홍남)이 최근 발간한 보고서 「한국의 초분」은 현재는 남서해안 일부 지역에만 현존하고 있는 초분 습속에 대한 최초의 종합조사 결과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보고서는 생생한 초분 현장 사진을 수록하고 있어 관련 전문분야 뿐만 아니라 일반에도 우리 전통 장례 습속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전망이다.

 

보고서는 초분이 미개사회의 습속인 것처럼 비칠 수도 있으나 "오늘날에는 오히려 부자나 효성이 지극한 사람만이 초분을 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고 말했다.

 

문헌자료 조사 결과로는 초분은 전염병에 죽거나, 어린아이가 죽었을 때, 객지에서 죽었을 경우, 집이 가난해서 장지를 구하지 못할 경우에 주로 시행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초분은 시신을 땅에 바로 묻지 않고 이엉 등으로 덮어두었다가, 2~3년 뒤에 뼈를 씻어 땅에 묻는 형태로 남아있다.


 

 

 

 

100년 전에는 육지 내륙에서 흔히 볼 수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위생법 제정과 화장 권장으로 현재는 남서해안 지역에만 남아 있다. 초분은 1970년대에는 새마을운동 여파로 비위생적이라 해서 금지된 적도 있다.

 

영화 '서편제'로 유명한 청산도나 여수 금오도·안도·개도, 고흥군 나로도, 신안군 증도·도초도·비금도, 영광군 송이도, 군산 무녀도, 부안군 계화도에 초분이 조사되었다.

 

이번 조사 결과 초분은 특히 '공달' 또는 '손 없는 달'이라고 하는 윤달에 이장을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있음>

taeshik@yna.co.kr

(끝)

 

***

 

이 초장은 실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광범위했으니, 거적데기 싸서 산에다가 시신을 갖다 버리는 소위 투장投葬이 그 일종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고고학에서 주로 장송葬送 의례와 관련해 사용하는 세골장洗骨葬, Bone Burial 은 이 초장과 밀접하다. 

 

이 초분 조사보고서는 졸라 중요하다. 이게 아마 국립민속박물관 홈페이지에서는 원문 제공을 할 것으로 본다. 관심 있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바란다. 

민박 김창일 선생이 안내한 원문다운로드는 아래

https://www.nfm.go.kr/common/extra/home/download/jsp/Page.do?dataIdx=48870&funcType=publBook&pathKey1=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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