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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헤이안 시대 (3): 무가정권이 주는 그늘

by 초야잠필 2024.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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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헤이안시대 문화수준은 한반도에 방불할 정도로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이야기했지만, 

왜 한반도에서는 일본의 문화수준을 낮게 보는 시각을 근세까지 유지했는가. 

바로 무가정권 때문이다. 
무가정권이 시작되면서 헤이안시대에 쌓아 올린 지적 성과들은 이른바 공경과 승려들에게로 퇴축되었고 
이를 대신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무사들은 

솔직히 필자의 생각으로 볼 때 글이나 알았을까 싶은 자들도 상당히 있다. 

물론 그 중에는 헤이안시대 이래의 문화적 유산에 감화해서 인텔리 사무라이로 자처한 이들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식자층의 위축은 간단히 다음 사실이 반영한다. 

일본에는 에도시대 이전, 전해오는 문적에는 목판본이 많지 않다. 
대부분 필사본이다.

비교적 많은 수의 문적이 남아 있지만 대부분이 필사본이며
목판본이 없는 것은 아닌데 매우 드물다. 

이를 필사를 중히 여기는 일본의 전통 운운하는 경우도 보았지만, 

필자는 그것이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바로 식자층 절대 숫자의 위축 징후로 본다. 

글을 읽고 문화를 즐기는 층이 줄어드니 당연히 독서층 수와 관련있는 목판의 필요성은 격감하지 않겠는가. 

사실 이러한 현상은 일본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경우에도 이른바 무신정권 시대.

이러한 식자층의 격감을 겪었다. 

무신정권 시대를 회고한 글 중에는 
이 시대에 글을 배우려면 절로 들어가 중을 스승으로 삼아야 했다고 한탄한 글도 있다. 

이와 방불한 현상이 헤이안시대의 몰락과 무가정권의 성립과 함께 도래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위축은 근세일본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해소된다고 할 수 있다. 

결론지어 말하자면, 

일본의 역사는 일자무식이다가 에도시대 갑자기 문화적으로 부상한 그런 역사가 아니라, 

헤이안시대에 이미 한번 고대문화의 정점을 쳤던 역사라 할 수 있다. 

그런 것이 무가정권 시대, 인문의 위축이 있었다가 근세에 다시 부활의 날갯짓을 하게 되는 역사인데, 

우리는 일본 문명을 고대부터 근세까지 계속 위로 달리는 그래프로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고대에 한번 피크를 쳤다가 내려앉았다가 근세에 다시 위로 달리는, 

복잡한 형세의 역사였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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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필사본. 에도시대 이전의 일본 전적은 상당수가 필사본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이 있을수 있겠지만 일차적으로 무가정권 성립 이후 식자층의 절대숫자 감소가 그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라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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