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헤이안시대는 대략 우리의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초기에 해당하는데
이 시대는 견당사 파견이전까지 한반 도를 통해 대륙문화를 섭취하던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직접 문화를 수용하여 비약적 도약을 한다는 데 있다.
우리가 일본사에 대해 관심이 없으면 흔히 생각하는 오류 중 하나가
일본은 근세 이전까지 항상 한국에 대해서는 문화적 수혜자의 입장에 있었다는 생각인데,
이런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일본의 헤이안시대는 문화적으로 볼 때 한반도의 수준을 방불하거나
일부 추월한 측면도 많이 보여준다.
통일 이전의 정치사회 체제를 계속 고수한 신라에 비해
헤이안시대 일본은 중국식 정치체제로 일변하고
문화적 수준도 상당한 정도에 도달했다.
예를 들어 이 시기에는 일본사에서 이른바 육국사라는 것을 남긴 시대인데,
육국사 중 일본서기를 제외한 것은 말이 역사책이지 실제로는 실록이다.
중국에서 실록이 등장한 것이 남북조시대부터라 하지만 실제로 제대로 기록이 남기 시작한 것은 당대부터라는데
이 제도를 그대로 들여와 기거주起居注를 남기고 그것을 책으로 묶은 것이 결국 일본서기를 제외한 나머지 육국사이다.
동시기에 신라 역시 비슷한 기거주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지만 책으로 묶지 못해 우리의 이 시대 기록은 매우 빈약하다.
한국인이 일본사에 대한 지식 없이 처음 건너가 그쪽 문화를 접할 때
가장 충격받는 부분의 하나가 바로 헤이안 시대의 문화 수준일 것이라 본다.
헤이안시대의 문화 수준은 상당하다.
이 시기에 이미 문화적으로 한반도의 수준을 따라 잡거나 일부 추월한 부분도 있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도 여전히 지속된 한반도 국가의 일본 문화에 대한 멸시는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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