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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20년만에 다시 조우한 어느 초등학교 교사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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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20년 전인 1998년, 그때 나는 지금과 여전히 같은 연합뉴스라는 곳을 직장으로 삼기는 했어도, 일하는 부서는 지금과 같은 문화부가 아니라 사회부라는 데였다. 소속이 다르다 함은 하는 일이 다르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해 나는 소위 경찰기자라는 것을 하다가 그해 중반쯤 담당이 바뀌어 서울시교위와 기상청을 맡게 되었으니, 이 시절이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해직시절에 비견할 만한 황금기였다. 왜인가? 사회부에서도 시교위와 기상청은 업무 부담은 거의 없고, 거의 모든 보도는 소위 풀(공유)이 원칙이라, 다른 기자를 물먹이는 일도 없었고, 내가 물을 먹을 위험성도 없었다. 게다가 대성학원이니 종로학원이니 중앙교육이니 하는 입시학원도 나와바리에 둔 까닭에, 이들이 가끔씩 기자실로 와서는 실로 적절히 때거리로 마련해주는가 하면, 돌아가면서 기자실 밥도 사던 때니깐 말이다. 

뿐인가? 서울시내 일선 고교 교장들이 가끔씩 개고기 대접을 하기도 했으니, 그때 좋다는 개고기집은 다 다녀봤다 해도 좋다. 딱 하나 불행은 그런 꿈과도 같은 생활이 딱 6개월만 주어졌다는 점이다. 뱃가죽 기름기 꽉 낀 그 시절은 그 해 연말, 12월 1일자로 인사 이동과 더불어 문화부로 와서 문화재와 학술을 담당하게 되면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곧이어 어쩌다가 느닷없이 문화체육관광부라는 출입처까지 뒤집어 썼으니, 지금 광화문 앞 대한민국역사박물관으로 쓰는 그 건물을 문화부가 쓸 때였다. 여담이나 그때가 김대중 정부 시절이라, 신낙균 문화부 장관 시절이었고, 대변인은 나중에 문화부 차관을 거쳐 국회의원까지 역임한 김장실 선생이었다. 

그 좋다는 짧디짧은 시교위 담당 6개월간 내가 유일하게 쓴 단독기사가 있었으니(이것도 실은 전통위반이었다. 시교위 모든 기사는 풀이 원칙이었으므로, 이를 나는 어긴 셈이다.) 아래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본문이 궁금하시면 아래 제목을 클릭하시면 된다.  

<화제>49년간 교단에 선 서울삼광초등 李玉禮교사

당시까지만 해도 초중등 교사는 65세 정년 퇴직이라, 이를 코앞에 둔 한 초등학교 여교사가 무려 49년째 교사생활을 한다는 것이었으니, 서울 용산구 후암동 삼광초등학교 5학년 3반 담임 이옥례(李玉禮) 교사(64)가 그 주인공이었다. 그 자세한 내력은 기사 본문에 충분히 언급되었으므로, 略하기로 하거니와, 이 분은 실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여전히 같은 용산구 남영동 처가에 빌붙어 살게 해주시는 마누라의 어머니, 곧, 나에게는 장모님 건물에 세든 한 음식점 부부 따님의 담임선생이였다. 이 따님과 어쩌다 이런저런 노가리를 풀다가, "우리 담임 선생님이 우리나라에게 가장 오래 선생님 생활을 하신 분이래요" 하는 말을 듣고는 취재에 들어가 보니 막상 저리되었던 것이다. 

이게 아마 순전히 우리네 언론 취재 전통이기도 한 듯한데, 이런 인터뷰성 인물 탐구에서 빠질 수 없는 대목이 가족사 내력이다. 저 기사 말미에는 "許星萬씨(66)와 결혼해 자녀 둘을 둔 그에게 許京萬 전남지사, 만화가 허영만씨, 허병만씨 순천대 총장은 시동생들이다"는 언급이 있거니와, 더 자세히 쓰지는 않았지만, 녹록치 않은 내력의 여인임을 엿볼 수 있다. 

보다시피 이 기사는 내가 그 취재 내력을 똑똑히 기억한다. 하도 많은 인상이 남았기 때문이다. 이후 이옥례 선생 근황은 전연 알지 못했다. 지금 고2인 아들놈 역시 삼광초등학교를 다니기도 했지만, 이 분은 이미 퇴임한 뒤였다. 그럼에도 이 분은 아주 가끔씩 주기발작적으로 그 시절을 생각케 하는 취재원 중 한 사람이다. 그 후속의 삶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그 옛날 이런 사람이 있었고, 그런 그를 내가 취재해 기사화하기도 했다는 그런 막연한 기억 환기 차원에서 떠오르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제다. 나랑 페이스북으로 연결된지는 아마 적어도 몇 년 이상은 되었을 법하고, 그 기간 내 포스팅 같은 데 아주 자주 좋아요를 누른다거나 아주 가끔 댓글을 다는 한 여성이 있어, 개중 어떤 댓글을 보니, 내가 사는 남영동이랑 10분 거리에 산다고 했다. 직접 대면한 일은 없었는데, 시종 단아하다는 느낌을 주는 여성이었다. 같은 동네 주민이라는 반가움 때문이랄까,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메시지를 통해 그에게 말을 걸었더니, 이내 반응이 있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나 보니 뿔싸, 그가 바로 저 이옥례 선생이 언급한 두 따님 중 한 분이라 한다. 한데 그 관계가 "법적인 따님"이라는 것이었으니, 이는 프라이버시 문제라 더는 자세한 말을 할 수 없거니와, 아무튼 그 반가움 혹은 의외성에 새삼 인연이라는 말을 떠올리기도 했다. 

듣자니, 이옥례 선생도 그렇고 이 분의 남편이자, 저 페친의 아버님 역시 2014년에 나란히 타계하셨다 한다. 

한데 내가 더 의아한 점이 있었다. 이 페친은 도대체 어찌 내가 20년 전 그 기사의 작성자임을 알고 있었을까? 그는 내가 문제의 기사 작성자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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