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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9개월만에 단기속성으로 뚝딱 해치운 경기전(慶基殿) 공사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9.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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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대 건축공사와 관련해 하도 말도 되지 않는 낭설이 작금 우리 문화재업계에서 횡행하거니와, 그런 낭설을 대표할 만한 생각 하나가 우리 선조들은 진짜로 건축물을 정성들여 잘 지었으며, 그리하여 10년, 20년 걸려 그 공사에 쓰는 나무도 베어서 갈라지지 않게끔 잘 건조했느니, 기와며 벽돌 같은 다른 건축 자재들도 그리 소중하게 갈라 터지지 않게끔 잘 만들어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런 낭설은 첫째, 소위 문화재 현장에서 사고가 터질 때마다 튀어 나오며, 둘째 그런 말을 버젓이 하는 자들이 하나같이 문화재 전문가를 자처하는 자들이라는 점에서 오류가 신화로 둔갑하는 구실을 한다. 문화재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그리 떠들어 제끼는데 그런 점에서는 단 한 번도 의심을 품어 보지 않은 일반시민사회 구성원들이야 "진짜로 그런갑다" 할 수밖에 더 있겠는가? 


저런 오류에 기반한 신화가 순전한 신화임을, 역사적 사실과는 하등 연관이 없다는 점을 나는 누누이, 그것도 역사적 실례를 들어가며 일일이 반론했거니와, 하지만 그뿐, 때만 되면 저런 주장어 터져나오는 곳이 문화재업계다. 내가 지금 또 그를 반복하거니와, 향후에도 어떤 문화재 현장이 붕괴하기만 하면, 저런 낭설은 또 터져나오기 마련이라고 장담한다. 



경기전



그렇다면 오류에 기반한 저런 신화는 무엇이 문제인가? 문화재에 대한 끊임없은 부당요구를 일삼는 까닭이다. 문화재는 수백년 혹은 천년 이천년을 견뎠는데, 현대에 들어 보수를 잘못하는 바람에, 선조들 지혜조차 따라잡지 못하고 엉터리 공사를 하는 바람에 공사 부실이 빚어지고 그에 따라 '소중한' 우리 문화재가 좀먹는다는 신화로 곧장 발전한다. 


그리하여 저 오류 기반 신화는 문화재는 붕괴해서도 안 되고, 썩어서도 안 되며, 더더구나 죽어서도 아니 된다는 또 다른 신화를 낳는다. 이 얘기는 하도 많이 해서 이젠 입이 아플 정도지만, 같은 얘기 줄곧 반복해야 하는 나 또한 분통이 터진다. 


각설하고, 전통시대 대규모 건축을 얼마나 전광석화처럼 해치웠는지, 요즘 내가 읽는 텍스트 중 하나에서 뽑아본다. 조선 중기 광해군 시대에 있었던 경기전(慶基殿) 중건 이야기다. 지금의 전주에 있는 조선 태조 이성계 어진을 봉안한 그 시설 경기전 말이다. 


전통시대 초상화는 그 자체 신주(神主)였으니, 조선시대 사대부가 초상화가 그리 많이 남은 이유는 그것이 바로 신주인 까닭이지, 남들한테 보여주기 위한 예술품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래서 신주는 언제나 사당에 모셨다. 그런 초상화이니, 왕의 초상화인 어진 또한 별도 사당 공간을 마련하고, 그에다가 봉안한 또 다른 종묘였다. 더구나 그 왕이 해당 왕조를 일으킨 창건주라면 그 대접이 남다를 것임은 불문가지하니, 창건주 초상화는 바로 종묘요 사직과도 같다. 



경기전



조선왕조에 그런 또 다른 종묘인 그런 경기전이 임진왜란 와중에 불탔다. 다행히 어진을 극적으로 건져 다른 곳에 피신시켜 놓았으니, 그러다가 전란이 끝나고 정국이 안정된 기미를 보이자, 왕조에서는 경기전 중건을 기획하게 된다. 


선조~광해군 연간에 활약한 조선 중기 문인이요 정치인 양경우(梁慶遇, 1568~?) 문집인 《제호집(霽湖集)》에는 호남 순찰사로 재직하면서 그 자신이 주도한 경기전 중건 사실을 정리해 비석에 새겨 적은 〔중수경기전비重脩慶基殿碑〕 라는 글이 제10권 잡저(雜著) 중 하나로 수록됐거니와, 해당 지방관인 방백(方伯)을 대신해 지었다는 이 중수문 첫 대목을 보면, 경기전을 어떻게 중수하게 되었는지, 그 내력이 다음과 같이 보인다. 


우리 전하(광해군)께서 보위에 오르신 지 6년째인 계축년(1613)에 신(臣)이 왕명을 받들어 호남에 순찰사로 갔습니다. 그해에 삼가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그에서 이르시기를,  


“완산(完山)은 성조(聖祖)께서 산 풍패(豊沛) 고장이다. 옛날에 진전(眞殿, 어진을 봉안한 건물)이 전주성 안에 있었으므로 왕적(王迹)을 크게 공경하여 백성들이 바라보면서 흠모하였더니, 불행하게도 세상의 근심을 피하여 영변부(寧邊府)로 영정(影幀)을 옮겨 모시니, 진전은 폐허가 되어 복구하지 못한 지 이제 17년이다. 난리가 평정된 지 그리 멀지 않고 백성들의 힘도 완전하지 못하여 그를 복구하려면 실로 몇 해를 기다려야 했으니, 밤낮없이 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하지 아니했다. 내가 장차 비전(閟殿)을 새로 세워 (어진을) 봉환(奉還)하려 하는데 오직 경(卿)은 실로 이 지역을 맡았으니 어찌 감히 경건하게 일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성계 어진



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신이 왕명을 받들어 놀라고 두려운 마음으로 옛터를 살펴보고 옛 제도를 물어 공역(工役)에 힘을 헤아리고 비용을 적게 사용했습니다. 이윽고 판자로 쓸 나무를 베고 서까래 기둥을 다듬으며 기와와 벽돌을 굽고 돌층계를 쌓고 담장을 두르는 것 등에 기일(期日)을 정해 하니 이루지 않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정전(正殿)이 이미 우뚝 섰고, 또 조촐하고 향기로운 음식과 가른 희생을 각각 보관할 곳과 사관(祠官)이 거처할 집과 번위(蕃衛)가 머물 곳을 차례로 세워 모두 단청까지 마치니 9개월 걸려 완공했습니다


중언부언이 필요치 않다고 본다. 이에서 보듯이 경기전을 중건하라는 명령을 받고, 공사에 착수한지 딱 9개월만에 다 해치운 것이다. 전통시대에는 나무를 베어 충분히 건조한 다음 자재로 쓴다? 목수나 고건축 전문가라는 자들이 이런 말 함부로 뱉곤 하는 모습을 자주 목도하는데, 전통시대 건축에서 그리한 사례를 나는 보지 못했다. 


왜 그런가? 그럴 여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젖은 나무를 그대로 가공해야 톱날 대패 도끼가 잘 들지, 바짝 마른 나무는 그보다 힘이 두 배 세 배 열 배는 더 들어간다. 고역 중의 고역이다. 전통시대 건축은 그것이 종묘건 궁궐이건 뭐건 바로 베어서 바로 가공하고 바로 세워서 그 상태로 자연 건조에 들어갔지, 무슨 10년을 두고서 송진을 뺀단 말인가? 


경기전은 궁궐 건축이다. 비록 그 규모가 경복궁 창덕궁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것이 엄연히 궁궐이요 종묘인 까닭에 그에 들어간 물자는 일반 사대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 대규모 공사를 후다닥 9개월만에 해치웠다. 


비단 경기전 만이 아니라 아무리 큰 공사라 해도 몇 년을 넘지 않는다. 원칙은 그해에 다 해치워야 한다. 저 큰 경복궁만 해도 순식간에 해치웠다. 기억에 3년 정도 걸리지 않았나 한다. 저 긴 한양도성도 몇년만에 뚝딱 해치웠다. 


왜 이런 단기속성 코스를 좋아했는가? 

지금도 그렇지만 공사는 공기를 단축할수록 예산이 적게 든다. 전통시대에는 예외가 간혹 있기는 하지만, 무임금 강제징발 노동력을 동원했다. 간단히 말해 월급도 안 주고 부려먹었다는 뜻이다. 새참이나 벤또 정도는 공급했을지 몰라도, 이조차 자체 조달해야 하는 일이 보통이었다. 


대규모 노동력 징발을 요하는 저런 대규모 토목 공사는 필연적으로 재정 고갈을 불러오기 마련이고, 그만큼 다른 데 투자해야 할 노동력은 고갈되기 마련이라, 특히 농업에는 치명적인 장애물이었다. 그리하여 농번기가 아닌 시즌에 대개 노동력을 징발했다. 


무임금이지, 노동강도는 세지, 불만은 쌓일 수밖에 없다. 자칫 폭동이 일어난다. 전통시대 왕조국가에서 제일로 두려워한 일이 바로 폭동과 반란이다. 대규모 토목공사는 항용 그럴 위험성을 노출했다. 따라서 토목공사는 단기간에, 그것도 순식간에 해치워야 했다. 


모든 대규모 토목 건축공사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달리 단기속성 코스로 끝난 이유가 바로 이에서 비롯한다. 


전통시대는 건축물을 진짜로 정성들여 잘 지었고, 그래서 수백년 수천년을 버텼다는 허무맹랑한 말은 이젠 지긋지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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