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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본남편이 내어준 기생 아내, 그와 이룬 사랑에 정실부인이 되고

by 한량 taeshik.kim 2019. 2. 20.

조선의 기생



《화랑세기》가 공개되자, 그것이 후대 누군가가 조작해 낸 역사서라고 하면서, 그 근거 중 하나로 그에 드러나는 성(姓) 풍속이 파천황을 방불하는 점을 들었거니와, 신라가 아무리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사회였다고 해도, 이 정도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뭐 그에 대해서는 내가 하도 많은 말을 해 놓았기에 중언부언할 필요를 느끼지는 못하나, 이 한 마디는 해야겠다. 


웃기는 소리들 그만 하고 자빠지세요. 


저가 모르면 툭하면 파천황이라는 말을 갖다 붙인다. 


아래는 조선 전기 때 사람 용재(慵齋) 성현(成俔·1439~1504)의 불후한 야담필기류인 《용재총화(慵齋叢話)》 제5권에 보이는 대중례(待重來)라는 기생 이야기다.


김 사문(金斯文, 사문<斯文>은 유학자 존칭)이 영남에 사신(使臣)으로 내려가 경주(慶州)에 도착하니, 고을 사람들이 기생 하나를 바치기에, 김이 데리고 불국사로 갔었는데, 기생은 나이가 어려서 남자와의 관계함을 알지 못했으므로, 극력(極力)으로 김의 요청을 거절하다가 밤중에 도망쳐 나왔는데, 그녀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평안감사와 관기



여러 하인(下人)이 그녀가 짐승에게 잡혀 간 것이 아닌가 해서 이튿날 찾아보니, 그녀는 맨발로 고을에 돌아가 있었다. 김은 뜻을 이루지 못함에 실망하고는 밀양(密陽)에 도착하자 평사(評事) 김계온(金季昷)을 보고는 그 사정을 말하니, 평사가 말하기를 “내 기생의 동생으로 대중래(待重來)라는 애가 예쁜 모습에 성품이 그윽하고 조용하니, 내가 그대를 위하여 다리를 놓아드리리다”고 했다.


하루는 부사(府使)가 영남루(嶺南樓) 위에서 잔치를 베풀니, 기생들이 자리에 가득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좀 예쁘기에 김 사문이 물으니, 그녀가 바로 평사가 다리를 놓아준다던 기생이었다. 김은 겉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았으나 마음은 줄곧 이 기생에게 가 있어 상에 가득 찬 맛있는 안주도 먹기는 해도 달지 아니했다.


주인과 시객(侍客)이 모두 술잔을 바치기에 김이 일어나 잔을 권하자, 평사가 그 기생을 시켜 잔을 받들어 바치게 하니, 김은 흔연히 웃으면서 의기양양한 기색이 있는 듯 했다.


(김 사문이) 이날 밤 그녀와 함께 망호대(望湖臺)에서 자고부터는 서로 정이 깊이 들어서 잠시도 떠나지 못하여, 대낮에도 문을 닫고 휘장을 치고서 이불을 쓰고 일어나지 않으니, 주인이 밥상을 가지고 와서 뵙고자 해도 만나지 못한 지 여러 날이었다.


평사가 창문을 밀치고 들어가니 두 사람은 안고 누워 손발을 서로 꼰 채 다른 말은 않고 오직 “나는 너를 원망한다”고만 했으니, 온몸에 써 있는 글자라고는 모두 서로 사랑을 맹세한 말뿐이었다.


그 후 그가 여러 읍을 순력(巡歷)했으나 마음은 언제나 대중래에게 가 있었다. 하루는 사문(斯文) 윤담수(尹淡叟)와 김해(金海)에서 밀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는 이야기를 하는데, (거리를 표시한 이정표인) 장생(長栍)을 보면 꼭  하인으로 하여금 이수(里數)의 원근(遠近)을 자세히 보게 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도 오히려 더디감을 의심하더니, 갑자기 펀펀한 들판이 아득한데, 어렴풋이 공간에 누각 모습이 보였다 없어졌다 하니, 하인에게 묻기를, “이곳이 어딘가.” 하니, 하인은 “영남루입니다” 하니 김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웃으니, 사문이 연구(聯句)를 짓기를, 


들녘은 넓은데 푸른 봉우리 가로질렀고 / 野闊橫靑峯

누각은 높아 흰 구름이 기대었네 / 樓高倚白雲

길가에 장생이 있으니 / 路傍長表在

응당 관문에 가까움을 기뻐하리로다 / 應喜近關門


했다. 밀양에 이르러 수십 일을 머무르니, 주인이 오래 있을까 염려해서 송별연을 누상(樓上)에서 베풀어 위로하니, 김은 부득이 행차하기로 하고 기생과는 교외(郊外)에서 이별하는데, 그가 기생 손을 꼭 붙들고 흐느껴 울 뿐이었다. 


평안감사 대동강 놀이에 동원된 관기들



어느 역(驛)에 이르러 밤은 깊은데, 잠을 이루지 못하여 그가 뜰을 거닐다가 눈물을 흘리며 역졸(驛卒)에게 말하기를 “내가 차라리 여기서 죽을지언정 이대로 서울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네가 다시 한 번 대중래를 만나게 해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하니 역졸이 불쌍히 여겨 그의 말을 따랐다.


밤중에 수십 리를 달려 날이 샐 무렵에 밀양에 도착했지만 부끄러워 부(府)에 들어가지 못하고, 은띠를 역졸에게 주고 흰옷 차림으로 울타리 길을 걸어가니, 우물에서 물긷는 노파가 있기에 김이 말하기를 “동비(桐非, 대중래의 아명)의 집이 어디 있소” 하고 물으니, 노파가 “저 다섯 번째 집이 그 집입니다”고 했다.


김이 다시 “네가 나를 알겠느냐” 물으니 노파가 한참 쳐다보다가 “알겠소이다, 지난 가을에 방납(防納)의 일로 오셨던 어른이 아니십니까”고 했다. 김이 돈주머니를 풀어 노파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나는 방납수(防納叟)가 아니라 경차관(敬差官)이니, 나를 위해 동비에게 가서 내가 왔다고 말하라” 하니 노파가 말하기를 “동비는 지금쯤 본남편 박생(朴生)과 더불어 같이 자고 있을 것이니 갈 수 없습니다”고 했다.


이에 김이 말하기를 “내가 만나볼 수는 없더라도 소식만 들을 수 있다면 족하니, 네가 가서 내 뜻만 말해 주면 후히 보답하리라” 하니, 노파가 그 집에 이르러 분부대로 알려주었다.


(그 소식을 들은) 기생이 머리를 긁으며 말하기를 “딱한 일이네. 어찌 이렇게까지 할까” 하니 (본남편인) 박생이 말하기를 “내가 그를 욕보일 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는 선생이요 나는 한갓 유생이니, 후진으로 선배를 욕보이는 일은 옳지 않으므로 잠깐 피하리다” 하고 숨어 버렸다.


기산 김준근 풍속화의 창기 검무(娼妓劍舞)



김이 기생집에 들어가니 관사(官司)에서 이 일을 알고 몰래 찬과 쌀을 보내었다. 수일을 유숙하자 기생의 부모가 미워하여 내쫓으니, 두 사람은 대밭 속에 들어가서 서로 붙들고 울부짖었다.


그 소리를 들은 이웃 사람들이 다투어 술을 가지고 와서 주었다. 기생을 데리고 가려 하는데 다만 말이 세 필뿐이므로 한 마리는 그가 타고 또 한 마리에는 이부자리와 농을 싣고, 나머지 한 마리에는 수종(隨從)하는 사람이 탔는데, 결국 수종인의 말을 빼앗아 기생에게 화살을 메고 말을 타게 하고 수종인은 뒤로 따라 걷게 하니, 신이 무거워서 걸을 수가 없어 끈으로 신을 묶어서 말 목에다 걸었다.


역에 돌아와서는 역졸이 모자와 띠를 섬돌에다 내동댕이치면서 말하기를 “내가 많은 사람을 겪어 보았으나 이처럼 탐욕스러운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고 했다.


서울로 돌아온 지 몇 달 만에 그의 아내가 죽으니, 김은 관을 실어 중모(中牟)에 장사지내고 장차 밀양으로 향하려고 유천역(楡川驛, 경북 청도역원<淸道驛院>)에 이르러 시를 짓기를,


향기로운 바람이 산 위 매화에 부니 / 香風吹入嶺頭梅

꽃다운 소식은 이러하되 돌아오지 않음을 괴로워하도다 / 芳信如今苦未回

달빛이 희어 시냇물 20리에 어리었는데 / 月白凝川二十里

옥인은 어디서 다시 오기를 기다리는가 / 玉人何處待重來


고 했다. 당시에 감사 김 상국(金相國)이 마침 그 기생을 사랑하다가 김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내주니 김이 서울로 데리고 갔다. 뒤에 김은 승지가 되어 벼슬이 높아지고 녹봉이 후해졌으며, 기생은 두 아들을 낳고 마침내 정실부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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