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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9

글은 미다시와 첫 줄이 생명을 좌지우지한다 "1938년 4월 4일 새벽, 피레네 산맥의 눈이 녹아 수량이 불어난 스페인의 에브로 강둑 위로 물에 흠뻑 젖은 두 남자가 차가운 물속에서 나와 기어 올라온다. 둘 다 미국인이다." 이제 펼치기 시작한 애덤 호크실드 지음, 이순호 옮김 《스페인 내전》(갈라파고스, 2018) 본문 첫 줄이다. 우리네 직업적 학문종사자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렇게 글 못 쓴다. 강렬하지 아니한가? 이 한 줄은 독자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 논문이 글을 죽이고 말았다. (2018. 5. 6) **** 나처럼 한때 혹은 제법 길게 영문학과 연이 있는 사람들에게 스페인 내전은 《두 팔이여 안녕》으로 수렴하니, 기타 그에 더해 나는 20세기 신종 독재의 한 형태로서 파시즘을 떠올리곤 한다. 이 사건이 참전용사이기도 한 어네스트 헤.. 2023. 5. 6.
논문도 현장성이 있어야 한다 내가 기자라서, 그래서 현장성을 강조한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나는 논문 역시 현장성을 떠날 수는 없다고 말한다. 현장성 없는 논문이 무슨 생명이 있다는 말인가? 한데 국내 소위 학술계 글쓰기 풍토를 보노라면, 이런 현장성을 가미한 구절이 들어가기만 하면, "이게 논문이냐 신문기사지"라는 비아냥이 판을 친다. 이 따위 글쓰기가 어딨단 말인가? 그 어떤 논문을 봐도 현장성이라고는 눈꼽 만큼도 없어, 무미건조하기가 현미밥 그대로 씹는 것만 같다. 이런 건 글도 아니다. 논문이라고 별천지가 아니다. 어찌 현장을 빼고 글을 쓴단 말인가? 논문 쓴다고, 그거 준비한다고 현장 방문하는 일 너무 자주 본다. 하지만 막상 그 글에는 그런 현장성이 도무지 드러나지 않아, 직접 보고 쓴 글인지? 혹은 도판 보고 지껄인 헛.. 2023. 1. 29.
spontaneous overflow vs. forced squeezing - 그놈이 그놈만 판치는 사회 이 얘기를 하면서 나 역시 아래에서 이야기할 '그놈이 그놈' '그 나물에 그 밥' 그 당당한 일원이기도 하다는 점을 적기해 두고자 한다. 그래서 이 말을 하는 내가 조금은 당당하기도 한다. 이것이 비단 한국만의 현상인지 아닌지는 알 수는 없지만,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한국사회 곳곳에서는 무엇의 조명을 표방하는 무슨 학술대회가 우후죽순마냥 쏟아지거니와 올해도 어김이 없어 요새 이 업계, 그러니깐 문화교육계에도 하루에도 많게는 십여 개나 되는 학술대회 개최를 안내하는 요란한 공지가 날아든다. 한데 그 꼴을 보면 맨 그 나물에 그 밥이라, 내가 직간접으로 간여하는 업계를 보면, 맨 그 나물에 그 밥이요 그 놈이 그 놈이라 질려서 악취가 진동한다. 그놈이 그놈 중에 어떤 놈은 기조강연 전문이고, 또 어떤 놈은 토.. 2022. 9. 16.
번역 안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번역할 글이 없어서다! 한국 역사문화가 외국에 잘 알려지지 못한 까닭은 우리의 연구가 영어로 번역되지 못해서라는 말이 다른 어떤 곳보다 이 분야 직업적 종사자 사이에서 버젓이 나오며, 또 그런 말이 실로 그럴 듯이 통용한다. 묻는다. 너희 논문 중에 외국 번역되어 쪽 안팔릴 놈 누구야? 있으면 나와봐. (2014. 3. 13) *** 번역이 안 되어서 외국에서 한국사 왜곡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번역할 만한 글이 없어서다. 한국학의 세계화는 번역의 문제라는 말은 어느 정도 타당한 측면은 있지만, 번역해서 부끄럽지 않을 논문이 있느냐가 더 큰 문제 아니겠는가? 2021. 3. 13.
질러나 본 논문 판에 박힌 논문 글쓰기 스타일을 탈피해보겠다 해서 나름대로 시도해봤다. 다른 뜻은 없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도 이리 쓰야 한다고 주장하고픈 맘은 추호도 없다. 글이야 어차피 저가 가장 자신있는 형식을 취해야 한다. 다만 나는 한가지만은 확신한다. 논문이 버려지는 이유는 문체 때문이라고. (2017. 11. 30) 2020. 11. 30.
내가 논문에서 계발되는 건 터럭만큼도 없다 내가 역사 관련 책이 무지 많을 줄로 안다. 그래 좀 많은 편이긴 하다. 하지만 소위 학문적 분파로 논한다면 저 분야에 속하는 장서 비중은 높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소위 역사 관련 책 읽지 않아도 역사 고고 미술 건축 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혹자는 웃으리라. 하지만 나는 논문 같은 잡쓰레기는 멀리한다. 선행연구를 대접하는 것과 논문을 중시하는 것은 엄연히 별개다. 나를 개발하는 건 남들 논문이 아니요, 태백이요 두보요 《용재수필》이며 《지봉유설》이며 《운급칠첨》이요 《문자文子》다. (2017. 11. 10) *** 내 얘기도 하기 바빠 죽겠는데 내가 미쳤다고 남이 쓴 글을 보겠는가? 남의 논문 보고 쓴 글은 제아무리 버둥해봐야 따라지다. 젤로 무익한 논문이 무슨 재검토라.. 2020.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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