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ESSAYS & MISCELLANIES

spontaneous overflow vs. forced squeezing - 그놈이 그놈만 판치는 사회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2. 9. 16.
반응형
이 초상을 그릴 시점 이미 저 워즈워스는 시심을 상실하고 계관시인이라는 안락의자에 앉아 연금 타먹고 살던 시절이었다.


이 얘기를 하면서 나 역시 아래에서 이야기할 '그놈이 그놈' '그 나물에 그 밥' 그 당당한 일원이기도 하다는 점을 적기해 두고자 한다. 그래서 이 말을 하는 내가 조금은 당당하기도 한다.

이것이 비단 한국만의 현상인지 아닌지는 알 수는 없지만,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한국사회 곳곳에서는 무엇의 조명을 표방하는 무슨 학술대회가 우후죽순마냥 쏟아지거니와

올해도 어김이 없어 요새 이 업계, 그러니깐 문화교육계에도 하루에도 많게는 십여 개나 되는 학술대회 개최를 안내하는 요란한 공지가 날아든다.

한데 그 꼴을 보면 맨 그 나물에 그 밥이라, 내가 직간접으로 간여하는 업계를 보면, 맨 그 나물에 그 밥이요 그 놈이 그 놈이라 질려서 악취가 진동한다.

그놈이 그놈 중에 어떤 놈은 기조강연 전문이고, 또 어떤 놈은 토론 좌장 전문이라, 이것이 지역색 혹은 전공까지 가미하면 더 한심해서 오늘 이 자리서 기조강연한 놈이 내일은 저 자리 가서 토론좌장을 하고, 모레는 또 저 자리 가서는 발표니 혹은 토론을 하는 꼴을 본다.

이 업계에 기조강연 전문가는 대체로 퇴임에 즈음하거나 퇴임한지 얼마 지나지 아니하는 노땅 교수 차지인 데 견주어 토론좌장은 그에 가까워지는 환갑 즈음한 교수 차지가 되는 일이 많다.

돌려막기 그 한심한 작태가 작금 대한민국 지식인 사회를 오염한다.
주제가 신선한 것도 아니요, 발표가 생경한 것도 아니니 그에서 무슨 격발이 있겠는가?

맨 그놈이 그놈이 자리만 바꾼 데 지나지 않아서, 소재가 다를 뿐 하는 말은 다람쥐 쳇바퀴 그것에 지나지 아니해서 이짝에서 한반도 중부지역 고대문화를 이야기한 놈이 소재만 바꿔 저짝 전라도로 가서는 마한문화라 하고, 섬진강 건너가서는 영남지역 고대문화라 떠들고 자빠졌더라.

이를 주최하는 데서는 왜 이런 한심한 놈들을 계속 불러내는가? 흔히들 인력풀을 탓하나, 편하기 때문이다. 학회를 주최하는 사람들로서는 내가 의뢰해서 하겠다 즉각 오케이 사인을 주는 놈들이 그리 고맙기 짝이 없거니와, 이런 놈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니 왜 이제서야 나한테 연락을 주나 하면서 대뜸 "언제냐"고 묻는다.

나는 학술대회 무용론 혹은 그에 가까운 신념이 있는 사람이다. 학술대회? 교류? 말뿐이지 무슨 교유가 된단 말인가? 그런 자리를 빌려 내 논점 교정한 놈 단군조선 이래 단 한 놈 보지 못했으니 어차피 내 얘기 주구장창 주창하려 그 자리에 설 뿐이다.

이 업계 투신해서 그것을 업으로 삼는자들이 흔히들 하는 말 중에 하나가 무슨 학술대회 토론을 통해 내 좁은 시야를 교정할 기회를 갖게 되었느니, 혹은 논문심사과정에서 나온 지적질로써 오류를 바로잡게 되었느니 하는 말이 있는데 새빨간 거짓말이다.

오타나 비문을 바로잡아주면 그게 가장 고마운 일이지, 지가 언제 토론을 통해, 심사평을 통해 지 신념을 꺾는단 말인가? 걸레 빨아 행주 만드는 일이 외려 빠르다. 다 부질없는 짓이다.

나는 훌륭한 글, 좋은 논문은 무슨 학술대회니 해서 강제로 할당해 나오는 일이 없다고 보는 사람이다. 실제로 내가 본 것들이 그렇다.

국가 혹은 지차체 혹은 그와 유사한 단체 기관과 협력이라는 미명 아래 급조한 학술대회에서 강제로 할당한 주제로 쓴 글로써 나를 격발한 글은 단 한 편도 없다.

그런 글은 쓰기 싫은데 억지로 써내려 갔다. 혹은 오직 발표비 하나 필요해서 억지로 썼다는 그런 윽박과 지겨움만이 물기 잔뜩 머금은 스펀지에서 흘러내리는 물기마냥 새어나기 마련이라,

그런 글을 쓴 놈이 고통이었는데, 그런 고통이 쥐어짜낸 글을 내가 읽으며 왜 내가 고통받아야 한단 말인가?

그렇담 훌륭한 글, 좋은 논문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윌리엄 워즈워스 말을 표절하건대 오직 spontaneous overflow가 있을 뿐이다.

그건 격발이고 격정이며 감발이며 감화다.

이걸 내가 쓰지 아니하면 인류역사에서 영원히 매몰하고 말 것이라는 절박과 절실에 비롯하는 사명, 그리고 일단 붓을 잡으면 일필휘지로 미친듯 써내려 가는 신내림이라야 한다.

“[Poetry] is the spontaneous overflow of powerful feelings: it takes its origin from emotion recollected in tranquility.”

비단 시뿐이랴? 저 말 한 마디가 새로운 시대를 격발했듯이 논문 역시 그러해야 한다.

계관시인이라는 안락의자에 앉으면서 그가 powerful feelings를 상실하면서 그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는 그 이력이 비단 시에서 그치겠는가?

powerful feelings, 그것을 잃어버리면 과감히 교단에서 내려와야 한다. 무슨 기조강연이며 토론좌장이며 발표란 말인가?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