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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률13

문맹률 70프로는 조선왕실과 일제의 합작품 1945년 현재 조선인 대부분은 교육도 제대로 못받은 문맹률 70프로 상태였다는 점을 말하였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필자의 견해로는 1945년 당시 조선인들이 이 꼴로 해방을 맞게 된 것은 조선왕조와 일제의 합작품이었다 할 수 있다. 한 예를 들어본다. 앞서 일본 메이지 정부는 자국 근대화 과정에서 모자란 재원을 보충하고 빠른 속도로 서구식 교육제도를 완성하기 위해, 가용한 전통시대 교육제도는 바닥을 박박 긁어서라도 이를 새 교육제도 만드는 데 써먹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래서 막부의 중앙 교육기관인 학문소는 동경대학의 기원이 되었고, 번교는 지방 관립대의 기원이 되거나 중학, 고등학교등 지방 교육기관의 전신이 되었다. 심지어는 전국적으로 수만 개가 있었다는 데라코야는 소학교로 전환하였다. 이 때문에.. 2023. 10. 3.
읽는 사람이 없었던 일제시대 잡지들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았던 유명한 일제시대 동인지들. 폐허, 창조, 백조 등등. 이런 동인지들은 통권 10호를 넘지 못했고 창간과 함께 폐간, 2호 내고 폐간도 많았다. 이를 대개는 일제의 탄압으로 쓰고 그것도 사실일 수도 있겠지만, 더 문제는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 더 문제였다고 하겠다. 왜? 조선인 대부분이 문맹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나라 근대사상 최초로 대중 판매가 폭발적으로 상업적으로도 성공하고 그것이 사상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 사실상의 최초의 잡지였을 "사상계"가 가능해진 이면에는 한국에서 까막눈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는 데 그 첫 번째 이유가 있다 하겠다. 사상계가 폭발적 판매고를 올리던 50년대 말이 되면 이미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대량 배출되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이승만 정부.. 2023. 8. 8.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포로 심문 자료 해방 후 5년이 지난 상태에서 20대 한국인 문맹률 상황을 볼 수 있는 자료다. https://db.history.go.kr/item/powr/main.do 포로신문보고서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데이터베이스현대사 포로신문보고서 ATIS Interrogation Reports 「포로신문보고서」는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맥아더 사령관 예하의 「연합국번역통역국(ATIS)」이 1950년~1952년 사이 제작하 db.history.go.kr 당시 심문대상인 3천626명 중 무학이 724명, 소학교 졸업 이하가 1449명 (중퇴 포함)로 전체의 60-70프로를 차지한다. 소학교 졸업 이하는 대략 졸업과 중퇴가 반반 정도 되는 것 같다. 대학재학 이상은 193명이다. 50년대 한국군 군대 입영보도를 보면 전체.. 2023. 4. 1.
4.19는 왜 학생이 주도했나 해방이후부터 이승만 정권 말기까지 학교수와 학생수가 급증하고 문맹률이 떨어지면서 이전과는 다른 정치적 상황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1960년 당시, 45년과 비교하여 대학생수는 10배가 늘어나 있었다 (10만명). 이때쯤에는 전국적으로 고등학생이 16만명 정도로 늘어나 있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 늘어나니 당연히 정치적 관심이 높아졌다. 1960년 당시 "사상계" 잡지 출판 부수는 놀랍게도 5만-8만부 였다고 한다. 60-70년대에 학생시위가 정치국면을 주도하게 된 이유는 고학력자가 그 위 세대에는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80년대 이후 바뀌기 시작했다. 이때도 여전히 학생시위는 많았지만 이전과는 받아들여지는 무게가 바뀌기 시작했는데, 고학력자가 중년층에서도 늘기 시작하면서라고 할 .. 2023. 3. 29.
전통시대 문화적 역량과 문맹률은 별개 한국과 중국은 오랜 문화적 전통이 있는 나라다.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도 문자 사용의 증거는 2000년을 넘는다. 오랫동안 책을 펴내 읽었고, 고려시대에는 8만매가 넘는 목판 인쇄를 두 번이나 감행했고, 금속활자까지 발명해서 썼다.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지적 전통은 계속 이어졌다. 일정숫자의 독서인구가 없이는 작동할 수 없는 과거제가 고려시대 이후 거의 천년이 이어졌다. 이러한 부분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인색할 필요는 전혀 없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착각하면 안되는 것은, 근세-혹은 근대의 "문맹률" 혹은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지식의 보급"은 이러한 전통시대 문화적 역량과는 완전히 별개의 물건이라는 것이다. 낮은 문맹률은 국민국가의 수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조건이며, 근대국가가 작동하기 위해.. 2023. 3. 28.
까막눈 천지였던 내 고향 이 블로그 필진인 畏友 신동훈 교수께서 이 즈음 계속 문맹률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주제인지를 설파하는 시리즈를 계속 중이라, 내 고향 이야기를 하려한다. 여러 번 썼지만 내 엄마 선친은 까막눈이셨다. 선친은 까막눈으로 살다 까막눈으로 가셨고 어머니는 지금은 까막눈은 아니시고 기본 한글은 비록 맞춤범은 엉망이나 쓸 줄도 알고 숫자도 쓸 줄 안다. 어머니가 까막눈을 면한 계기는 조카딸이었다. 이 조카딸이 외손녀라는 이유로 친손자에 견주어 갖은 차별을 받기는 하나 어이한 셈인지 천성이 그러한 것도 있고 해서인지 몰라도 툭하면 김천으로 행차해 할머니한테 아주 잘하는데 어느날은 보니 할머니한테 한글을 가르치고 있더라. 엄마가 까막눈을 벗어나기는 순전히 이런 조카딸 덕분이다. 문제는 김녕김씨 집성촌인 내 고향에서 .. 2023.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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