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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59

본남편이 내어준 기생 아내, 그와 이룬 사랑에 정실부인이 되고 《화랑세기》가 공개되자, 그것이 후대 누군가가 조작해 낸 역사서라고 하면서, 그 근거 중 하나로 그에 드러나는 성(姓) 풍속이 파천황을 방불하는 점을 들었거니와, 신라가 아무리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사회였다고 해도, 이 정도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뭐 그에 대해서는 내가 하도 많은 말을 해 놓았기에 중언부언할 필요를 느끼지는 못하나, 이 한 마디는 해야겠다. 웃기는 소리들 그만 하고 자빠지세요. 저가 모르면 툭하면 파천황이라는 말을 갖다 붙인다. 아래는 조선 전기 때 사람 용재(慵齋) 성현(成俔·1439~1504)의 불후한 야담필기류인 《용재총화(慵齋叢話)》 제5권에 보이는 대중례(待重來)라는 기생 이야기다. 김 사문(金斯文, 사문은 유학자 존칭)이 영남에 사신(使臣)으로 내려가 경주(慶州)에 도착하니,.. 2019. 2. 20.
화랑세기 비사 - 신라시대의 분방한 성문화 *** 아래는 대한남성과학회 간행 기관지인 《 건강한 성 행복한 삶》 2017년 15권 1호(간행일 2017-07-21) '성칼럼 : 화랑세기 비사 - 신라시대의 분방한 성문화'라는 제목으로 실린 기고문으로 아래서 원문 PDF를 제공한다. 내가 이곳에 전재하는 원고는 이 학회 제출본이라, 혹 최종 간행본의 그것과 차이가 있을 수도 있음을 밝혀둔다. http://www.andrology.or.kr/pdf/2017_01/01.pdf 화랑세기 비사 - 신라시대의 분방한 성문화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역사전문 언론인 “어머니와 아들이 간음한 흉노보단 낫다” “아내를 얻을 때 같은 성씨를 취하지 않음은 구별을 두터이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노(魯)나라 공작이 오(吳)에 장가들고, 진(晉)나라 후작이 성.. 2019. 1. 7.
미실을 간병하다 병을 얻은 설원랑 화랑세기 7세 풍월주 설원공전 한 대목은 그와 그의 베아트리체 미실의 '이상한' 죽음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설원)공은 건원(建元) 14년(549)에 나서 건복(建福) 23년(606) 7월에 卒했다. 그때 미실궁주가 이상한 병에 걸려 여러 달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공이 밤낮으로 옆에서 모셨다. 미실의 병을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밤에는 반드시 기도하였다. 마침내 그 병을 대신하였다. 미실이 일어나 슬퍼하며 자신의 속옷을 함께 넣어 장사를 지내며, ‘나 또한 오래지 않아 그대를 따라 하늘에 갈 것이다’고 하니 그때 나이 58세였다. 당시 58세는 장수까지는 아니라 해도, 그런대로 천수天壽를 누렸다 할 만하다. 그럼에도 이 대목이 허심하지 아니하게 보이는 까닭은 혹 돌림병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사기도 하는 .. 2018. 12. 6.
김춘추의 여인들(3) 고타소 이 고타소古陀炤는 앞서 여러 번 다루었고, 그것이 등장하는 맥락이나 사건은 이곳 내 블로그에서 '고타소' 혹은 그의 남편 '품석'으로 검색하면 되거니와, 혹 그것들이 모두 필요하신 분들은 참고바란다. 고타소란 이름은 내 조사가 철저한지 아닌지는 자신이 없거니와, 일단 내 추산대로라면 《삼국사기》 권 제41 열전 제1 김유신上에 보이거니와, 그것이 등장하는 맥락은 다음과 같다. 선덕대왕 11년 임인(642)에 백제가 대량주(大梁州)를 격파했을 때, 춘추공(春秋公)의 딸 고타소랑(古陀炤娘)이 남편 품석(品釋)을 따라 죽었다. 춘추가 이를 한스럽게 여겨 고구려에 청병함으로써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으려 하자 왕이 허락했다. 이것이 삼국시대 말기, 삼국 관계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대량주, 곧 지금의.. 2018. 10. 8.
풍납토성, 무령왕릉, 그리고 권오영 여러 번 이곳저곳에서 말했듯이, 나한테 《직설 무령왕릉》은 해직이 준 선물이었다. 나는 2015년 11월28일, 연합뉴스에서 해직되었거니와, 졸저는 이듬해 4월 30일자로 찍혀 도서출판 메디치미디어에서 나왔다. 해직을 축복으로 여긴 나는 이때다 싶어, 기간 미룬 일이나 이참에 마침표를 찍자 해서, 나아가 뭐 이래저래 소일거리 삼아 옛날 원고를 뒤척이며, 이 참에 그 옛날에 사산死産한 무령왕릉 원고 정리에 들어가기로 했으니, 그리하여 마침내 저 졸저가 나왔다. 남들 생각보다 일이 훨씬 빨리 진행된 까닭은 실은 그 원고가 2001년에 이미 완성을 본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15년이 흘러버렸으니, 손볼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거니와, 무엇보다 그 사이에 무령왕릉을 둘러싼 무수한 변동이 있었다. 지금.. 2018. 9. 29.
욕망의 변주곡, 《화랑세기》(3) 여왕의 눈물겨운 종자투쟁 아래 원고는 2010년 11월 6일 가브리엘관 109호에서 한국고대사탐구학회가 '필사본 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주제로 개최한 그해 추계학술대회에 '욕망의 변주곡, 《화랑세기》'라는 제목을 발표한 글이며, 그해 이 학회 기관지인 《한국고대사탐구》 제6집에는 '‘世紀의 발견’, 『花郞世紀』'라는 제목으로 투고됐다. 이번에 순차로 연재하는 글은 개중에서도 학회 발표문을 토대로 하되, 오타를 바로잡거나 한자어를 한글병용으로 하는 수준에서 손봤음을 밝힌다. 농촌 출신인 나에게 종묘(種苗)라는 말은 익숙하다. 곡물 종자라는 뜻이다. 이 種苗가 좋아야 곡물 소출이 좋을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물론 종자(種子) 혹은 種苗가 좋다 해서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더불어 우리는 사람을 지칭해서도 種子를 운운.. 2018.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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