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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491

장화왕후 오씨, 질외사정 피임을 거부한 왕건의 여인 잘 알려진 것처럼 고려 태조의 후비는 29명이다(왕건이시여~). 그중 성씨, 본관, 아버지, 할아버지, 외할아버지에다가 어머니의 이름이 밝혀진 분은 둘째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 한 분뿐이다. 장화왕후 오씨吳氏는 나주인羅州人이다. 할아버지는 오부돈吳富伅, 아버지는 오다련군吳多憐君으로, 대대로 나주의 목포木浦에 살아왔다. 오다련군은 사간沙干 연위連位의 딸 덕교德交에게 장가들어 왕후를 낳았다. - 권88, 열전1, 후비1, 태조 후비 장화왕후 오씨 같이 실린 다른 태조의 후비들을 보면 본관과 아버지 정도만 언급되고, 더러는 성씨마저 잃어버린 경우도 있다. 분명 이들은 당대 내로라하는 세력의 여식들이었을 것인데 말이다. 나 는 한목소리로 오씨의 집안이 '측미側微'하다고 진술한다. 그 진술 뒤에는 그래가지고 태조가.. 2024. 1. 14.
연애결혼으로 들어온 며느리를 싫어한 시아버지 고려 문종 사위 사랑은 장모요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데, 고려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군주 문종文宗(1019~1083, 재위 1046~1083)은 그렇지 못했다. 권88, 열전1, 후비1, 순종順宗(1047~1083, 재위 1083년 7~10월) 후비 선희왕후宣禧王后 김씨金氏 조를 보자. 순종은 문종 아들이다. 선희왕후 김씨는 경주인慶州人으로 대경大卿 김양검金良儉의 딸이다. 순종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 궁에 뽑혀 들어가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문종文宗이 미워하여 칙서[勑]를 내려 궁궐 바깥의 집으로 돌려보냈으며, 그런 까닭으로 끝내 자식이 없었다. 연복궁주延福宮主라 불리었고, 인종仁宗 4년(1126) 2월에 죽자 선희왕후라고 추시追諡하였다. 태자가 좋아해서 들인 아내를 시아버지는 용납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 2024. 1. 14.
왕의 부인임에도 능陵에 묻히지 못하다 의 축, 임금 현종顯宗(992~1031)에게는 13명의 왕후와 후궁이 있었다. 그중 원목왕후元穆王后 서씨徐氏(?~1057)라는 이가 있다. 이천 서씨로 내사령內史令 서눌徐訥(?~1042)의 딸이고, 세 치 혓바닥으로 거란 군사를 되돌린 서희徐熙(942~998)의 손녀다. 현종과 1022년(현종 13) 혼인하였으니 아마 1000년~1005년 어간에 태어나지 않았을까 싶은데, 현종보다는 26년을 더 살았다. 그가 죽자 문종은 이런 명을 내린다. 후비 열전을 보면..... 문종文宗 11년(1057) 5월에 죽자 ... 또 제制를 내려 명하기를, “흥성궁주興盛宮主의 화장火葬을 마치면 해당 관청에 명하여 타고 남은 유골을 묻고 능을 두며 시위侍衛할 관리와 능을 지킬 민호民戶를 정하여 각 절기[歲時]마다 제사를 받.. 2024. 1. 14.
일본에서 쓴 유길준이라는 인물의 필적 개화의 시대, 별처럼 빛날 수 있던 선각자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아예 빛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스러졌거나, 초신성마냥 잠깐 반짝이고 사라질 뿐이었다. 구당矩堂 유길준兪吉濬(1856-1914), 그도 분명 선각자였다. 재동 백송 그늘 아래에서 배운 개화파였던 그는 당시 조선의 누구보다도 세계가 돌아가는 정세에 밝았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각을 적은 저술을 남겼고, 잠깐이나마 경륜을 펼칠 기회도 얻었으니 다른 이에 비하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 때문에 친일파라는 굴레에서 자유롭지만은 않게 되었으니 역사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남작 작위를 반납한 덕인지 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 일본과 미국 유학, 조선 중립화론, 갑오개혁의 선봉장, 일본 망명과 귀국, 한성부민회 회장...... 2024. 1. 13.
남자가 바느질을 하다니? 이규보의 기롱 애처가 눈빛처럼 하얀 비단 치마 밟아 찢어지니/ 踏破香紈雪色裙 뉘 집 휘장에서 탁문군卓文君 희롱했나 / 誰家帳底弄文君 부인께선 삼가 바느질일랑 그만두시고 / 細君愼勿加針線 앞으로는 무산에서 운우 꿈 꾸시구려 / 又向巫山染雨雲 - 전집 권5, 고율시, "이중민 군이 치마를 꿰맨 일을 희롱함" *** Editor's note *** 남자가 바느질을 해서는 안 되는데 백운거사 이규보 친구가 마누라 대신해서 바느질을 한 모양이라 그걸 희롬삼아 시로써 읊었다. 이 시에서 건져내야 할 것은 바느질이 적어도 이규보 시대에는 여성의 전유물로 통했다는 점이다. 이는 보희 문희 김유신 김춘추 축국 이야기에서도 여실히 증언한다. 다시 말해 적어도 이 시를 기준으로 신라시대 이래 이규보 시대 고려 중기에 이르기까지 바느질은 .. 2024. 1. 11.
이규보는 언제 이름을 바꿨을까 이규보(李奎報, 1168~1241)라는 인물을 몇 년째 파고들었다. 그런데 무심코 넘겼지만 생각보다 중요할 것 같은 사실 하나를 빠뜨려서, 여기 정리해두고자 한다. 바로 ‘이규보李奎報’라는 그의 이름에 관해서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이인저李仁氐’였다. 이십팔수二十八宿의 세 번째 ‘저성氐星’에서 글자를 딴 것 같다. 그렇게 22년을 살다가 1189년(명종 19) 이십팔수의 열다섯 번째 ‘규성奎星’에서 글자를 따 ‘규보奎報’로 이름을 바꾼다. 그런데 그가 이름을 바꾼 시점을 두고 『동국이상국집』과 『고려사』 의 기록이 엇갈린다. 기유년(1189) 사마시(司馬試, 국자감시)에 나아가려고 했을 때, 꿈에 어떤 촌백성인 듯한 노인들이 모두 검은 베옷을 입고 마루 위에 모여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옆 사람이 .. 2024.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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