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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철의 잡동산이雜同散異285

한문 공부, 논어집주보단 동호문답을 한문 공부를 시작하려는 분들이 보통 《논어집주》를 붙들고 시작하지만, 끝까지 일독하는 이는 거의 없다. 논어가 쉬운 책이면 주희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주석을 달 필요가 있었겠는가? 대단히 어려운 책이어서 수십 번을 보았어도 문리를 다 깨치지 못한 부분도 많다. 나는 한문 공부를 하고싶다는 분들에게 자신의 관심분야 책을 선정해서 읽으라고 권한다. 자신이 잘 아는 분야의 책을 골라 인명, 지명, 고유명사에 밑줄만 그어 놓고 보면 번역할 동사, 형용사, 부사 등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고 반복하다보면 문리가 빠르게 차츰 뜨인다. 전근대 유자들의 글은 사서삼경을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렵다. 좀 더 심화된 과정으로 가려면 사서삼경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 그러나 옛 어른들처럼 암송할 필요는 없다. DB가 잘 구축.. 2020. 10. 4.
가장 치열했던 조선의 신분제 법 개정 논쟁..노론은 수구반동, 남인은 진보라는 신화를 깨뜨린다 조선의 최상위법인 《경국대전》에서 정한 신분제는 양천제(良賤制)이며, 양인은 그 자체에 인도의 카스트만큼 다양한 계층이 존재했다. 양반도 큰 의미에서는 양인의 범주에 든다. 그렇다면 날 때부터 정해지는 신분은 어떤 기준을 따르는가?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는 종모법(從母法)이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사조(四祖)가 대단히 중요하여 과거 시험을 볼 때도 반드시 신원조회처럼 사조를 기록했으니,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고조할아버지가 아님]를 이른다. 외할아버지를 기재하는 이유는 어머니의 신분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에도 족보를 만들 때 제출하는 수단(收單)에 사조(四祖)를 기록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양인은 군역의 의무가 있었는데 품관(品官)인 양반은 군역의 의무가 없었다가 임란을 기.. 2020. 10. 3.
그냥 놀아서 좋은 개천절 개천절이 10월 3일. 근거가 뭔지도 모르고, 정한 사람도 모르긴 마찬가지였겠지만 노는 날이니 그냥 좋은 날에 불과하다. 과연 개천절이 합당한 국경일일까? 《삼국유사》의 귀신 씨나락 까먹는 저 두 구절로 단기 2333년을 산출한 것도 웃기지만, 10월 3일은 또 뭐람. 2020. 10. 3.
호환이 무서웠던 하남정사 한말의 학자 변만기(邊萬基)는 망암 변이중의 후손으로 《봉남일기(鳳南日記)》를 남겼다. 내 고조부와 벗으로 하남정사에 문상(問喪)한 기록 등이 그의 일기에 전한다. 그는 을미년(1895) 5월 30일 일기에서, 서이면 매실[梅谷] 기씨 가문의 한 부인이 며칠 전에 호랑이에게 잡아먹혔다는 말을 들었다. [三十日 聞西二梅谷奇門一婦人, 數日前爲虎所食云.] 라고 하였고, 다음 달인 윤5월 9일에는 서이면 매실에서 함정을 설치하여 호랑이 한 마리를 잡았다고 들었다. [閏五月 聞西二梅谷, 設陷穽, 捉得一虎云.] 라고 하였으니, 호환을 당한 이후 대대적으로 나서 열흘 전후로 잡은 듯하다. 서이면은 오늘날 장성군 황룡면이고, 매곡은 하남정사 서남쪽 200미터쯤 아래에 있는 맥호리 매실이라는 마을이다. 호랑이에게 잡아먹.. 2020. 10. 2.
우연히 남은 역사 기록, 기대승의 면앙정기 두 편 담양 면앙정俛仰亭은 기문記文이 무척 많다. 애초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이 지은 〈면앙정기俛仰亭記〉가 있었으나, 고봉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 사림의 영수로 부각하자 〈면앙정기〉를 지어달라고 청하여 받았다. 그런데, 기대승이 지어 준 기문에는 송순의 벗으로 당시 담양부사였던 오겸(吳謙, 1496~1582)이 담양의 공금으로 정자를 지어 주었다는 내용이 실려있었다. 그러다가 선조 초 율곡 이이(李珥)가 사림의 적으로 유속(流俗)의 무리를 공격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유속의 무리가 바로 송순과 오겸이었다. 그리하여 송순은 기대승에게 다시 기문을 고쳐달라고 하여 새로운 〈면앙정기〉를 걸게 된다. 거기에는 불리한 내용은 모조리 빼버린다. 보통은 나중 것만 문집에 수록할 텐데, 《고.. 2020. 10. 2.
식민지 조선을 덮친 스페인독감 우리는 먼 유럽 이야기로 알지만, 스페인독감이 식민지 조선을 휩쓴 일이 있었다. 스페인독감은 1918년 당시에 무오년독감戊午年毒感 또는 서반아감기西班牙感氣라고 했다. 1918년 조선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당시 조선 인구 1,759만 명 가운데 약 16.3%인 288만 4,000명이 감염되었고, 그중 14만 명이 사망했다. 사망률은 1.8%였다. 2020.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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