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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철의 잡동산이雜同散異

우연히 남은 역사 기록, 기대승의 면앙정기 두 편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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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면앙정俛仰亭은 기문記文이 무척 많다. 애초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이 지은 〈면앙정기俛仰亭記〉가 있었으나, 고봉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 사림의 영수로 부각하자 〈면앙정기〉를 지어달라고 청하여 받았다.

그런데, 기대승이 지어 준 기문에는 송순의 벗으로 당시 담양부사였던 오겸(吳謙, 1496~1582)이 담양의 공금으로 정자를 지어 주었다는 내용이 실려있었다.

그러다가 선조 초 율곡 이이(李珥)가 사림의 적으로 유속(流俗)의 무리를 공격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유속의 무리가 바로 송순과 오겸이었다.

그리하여 송순은 기대승에게 다시 기문을 고쳐달라고 하여 새로운 〈면앙정기〉를 걸게 된다. 거기에는 불리한 내용은 모조리 빼버린다.

보통은 나중 것만 문집에 수록할 텐데, 《고봉집高峰集》에는 둘 다 수록해 놓았다. 나중에 편찬한 《면앙집俛仰集》에서는 그 의미를 모르고 둘 다 수록하였다.

이후 속종 26년에는 담양부사 심중량(沈仲良)에게 다시 기문을 받았으니, 당시 집권 소론의 도움으로 송순의 시호를 받을 심산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정국이 급변하여 실각하고 만다.

대단히 길지만 두 기문을 비교해 보면 면앙정이 어떤 기능이었고, 어떻게 지어졌는지 알 수 있다.



기대승의 첫 번째 〈면앙정기〉

큰 허공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땅의 형체는 단 한 덩어리의 물건일 뿐이다. 이것이 아래로 내려가서 물이 되고 높이 솟아서 산이 되었는데, 이것들이 또 한 덩어리로 땅 가운데에서 절로 흐르고 절로 솟아 있다.

인간이란 하늘의 천명(天命)을 받고 땅의 형질(形質)을 받아 산수(山水) 간에 놀고 거처하는데, 눈으로 보아서 사랑스러울 만하고 귀로 들어서 기쁠 만한 아름다운 경치를 또 조물주가 인간을 위하여 제공해 주는 듯하다. 그러나 놀기에 적당하여 나의 귀와 눈에 싫지 않은 것으로 말하면, 반드시 높은 산을 넘고 아득한 곳으로 나간 뒤에야 그 완전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너른 수백 리에 산과 물이 다투어 기이한 경치를 드러내고 있는데, 내가 곧 한 언덕의 위에 앉아 이것을 모두 다 소유하는 것으로 말하면, 놀기에 적당하고 즐거움이 온전함이 과연 어떻다 하겠는가.

지금 완산 부윤(完山府尹)으로 있는 송공(宋公 송순(宋純) )이 사는 집 뒤 끊어진 기슭의 정상에다 정자를 짓고 ‘면앙정(俛仰亭)’이라 이름 붙였는데, 앞에서 말한 놀기에 적당하고 즐거움이 완전하다는 것들이 그야말로 모두 갖추어져 있어서 딴 데서 구할 것이 없다.

처음에 공의 선조 중에 휘(諱) 모(某)란 분이 연로하여 벼슬길에서 물러나 기곡(錡谷) 마을에 거주하니, 자손들이 인하여 이곳을 거주지로 삼게 되었는데, 노송당(老松堂)의 옛터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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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곡에서 북쪽으로 걸어서 채 2, 3리가 못 되는 곳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산을 등지고 양지바른 곳에 있으며 토지가 비옥하고 샘물이 달다. 이곳에 한 뙈기의 집이 있으니 공이 신축한 것으로 이 마을 이름은 기촌(企村)이라 한다.

기촌의 산은 서리고 울창하며, 가장 빼어난 봉우리를 ‘제월봉(霽月峯)’이라 한다. 기촌에서 제월봉 허리를 지나 돌아서 북쪽으로 나오면 산자락이 조금 아래로 내려가 건방(乾方)을 향하여 쭈그리고 있는데, 산세가 마치 용이 드리운 듯 거북이가 고개를 쳐든 듯하여 구불구불하고 높이 솟아 있으니, 이곳이 바로 면앙정이 있는 곳이다.

면앙정은 모두 세 칸인데, 긴 들보를 얹어서 들보가 문미(門楣)보다 배나 높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를 보면 단정하고 확 트였으며 판판하고 바르며 그 모서리는 깎아지른 듯하여 마치 새가 나래를 펴고 나는 듯하다. 사면(四面)을 비우고 난간을 세웠으며, 난간 밖은 지형이 다 약간의 벼랑인데, 서북쪽은 특히 절벽이다. 빽빽한 대나무가 병풍처럼 둘러 있고 삼나무가 울창하다.

그 아래에는 ‘암계촌(巖界村)’이란 마을이 있으니, 산에 돌이 많고 깎아지른 듯하기 때문에 암계촌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동쪽 뜰 아래에는 약간 아래로 내려간 산세를 인하여 확 터놓고, 온실(溫室) 4칸을 지은 다음 담장을 둘러치고는 아름다운 화초를 심어 놓고 서책을 가득히 쌓아 놓았다.

산마루에서 좌우 골짝으로 내려가면 큰 소나무와 무성한 나무들이 울창하게 서 있다. 정자가 있는 곳은 이미 지형이 높고 탁 트였으며 또 대나무와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인간 세상과 서로 접하지 않으니, 아득하여 마치 별천지(別天地)와 같다.

빈 정자 안에서 멀리 바라보면 그 시원한 모습과 우뚝 솟은 산세가 이어져 구물구물하는 듯하고 뛰어서 나오는 듯하니, 마치 귀신이나 이상한 물건이 남몰래 와서 흥취를 북돋아 주는 듯하다.

동쪽으로부터 온 산은 제월봉에 이르러 우뚝 솟았는데, 그 한쪽 자락이 편편하고 구불구불하게 서쪽으로 큰 들에 임하여 3, 4리 사이에 뻗쳐 있는데 모두 여섯 굽이이다.

정자 뒷산은 왼쪽으로 연결되고 오른쪽으로 연결되어 가장 높고 차례로 솟아나왔으며, 동북으로부터 달려서 서남 수백 리에 뻗쳐 있는 산들은 높기도 하고 뾰족하기도 하며 울퉁불퉁하기도 하고 한곳으로 모이기도 하며 함께 달려가기도 하였는데, 우뚝한 바위와 큰 돌로 딱 버티고 서 있는 것은 용구산(龍龜山)이요, 아래 기슭이 빙 둘러 있고 정상이 뾰족하며 단정하고 후중하며 성글게 서 있는 것은 몽선산(夢仙山)이다.

기타 옹암산(瓮巖山), 금성산(金城山), 용천산(龍泉山), 추월산(秋月山), 백암산(白巖山), 불대산(佛臺山), 수연산(修緣山), 용진산(湧珍山), 어등산(魚登山), 금성산(錦城山) 등 여러 산은 창고 같기도 하고 성곽 같기도 하며, 병풍 같기도 하고 제방 같기도 하며, 와우(臥牛) 같기도 하고 마이(馬耳) 같기도 하다.

푸른 산이 배열되어 사람의 눈썹 같기도 하고, 상투 같은 것이 어긋나게 숨었다 드러났다 하기도 하며, 아득히 보이다 없어지기도 하고 내와 구름에 열리고 닫히기도 하며, 초목들이 꽃이 피었다가 지곤 하여 아침저녁으로 모양이 다르고 겨울과 여름에 징후가 다른데, 이 사이에 기인(畸人)들이 도술(道術)을 익힌 것과 열부(烈婦)들이 절개를 지킨 것은 특히 사람으로 하여금 멀리 생각하고 길이 상상하게 한다.

물이 옥천(玉泉)에서 근원하여 나온 것을 여계(餘溪)라 하는데, 바로 면앙정 뒤쪽 기슭 앞을 감돌아 잔잔히 흐르고 맑아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장마에도 넘치지 않는다.

넘실넘실 아득히 흐르며 가다가도 멈추는 듯한데, 석양에는 뛰는 고기들이 텀벙거리고 가을 달밤에는 조는 백로들이 다리를 연해 있다. 그리고 용천(龍泉)에서 근원한 것은 읍내에 이르러 백탄(白灘)이 되어서 꺾어 흐르고 가로질러 졸졸 흐르다가 깊은 못이 되어 여계와 함께 흘러 한 마장쯤 지나서 합류하여 서쪽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서석산(瑞石山)에서 발원(發源)한 것은 정자 왼쪽 세 번째 굽이의 밖으로부터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아래로 흘러 앞의 두 내와 합류하여 곧바로 용산에 이른 뒤 혈포(穴浦)로 흐른다.

아득한 큰 들은 추월산 아래에서 시작되어서 어등산 밖 만타미(曼陀靡)의 불단(佛壇)이 있는 곳까지 뻗쳐 있는데, 깊이 들어가기도 하고 높이 솟기도 하여 구릉과 숲이 서로 가리고 있는 것이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이 사이에는 도랑과 밭두둑이 아로새긴 듯이 널려 있고 마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그 사이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봄이면 밭을 갈고 여름이면 김을 매고 가을이면 수확하여 한때도 쉼이 없으며, 사시의 경치도 또한 이와 더불어 무궁하게 펼쳐진다.

복건(幅巾)에 짧은 잠방이를 입고서 난간 위에 기대 있노라면 높은 산과 멀리 흐르는 물, 떠 있는 구름과 노니는 새와 짐승 또는 물고기들이 모두 자유롭게 와서 내 흥취를 돋운다.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나막신을 끌고 섬돌 아래에서 조용히 거니노라면, 푸른 연기는 절로 멈춰 있고 맑은 바람은 때로 불어온다. 소나무와 회나무에서는 바람 소리가 들리고 온갖 울긋불긋한 꽃들은 향기가 온통 가득하니, 자유롭게 육신을 잊어버리고 한가롭게 조물주와 놀 수 있어서 일찍이 다함이 없다.

아, 아름답다. 이 정자여! 그 안에 가 있어 보면 빙 둘러 있는 산과 그윽한 경치를 고요히 보면서 즐길 수 있고, 그 밖을 바라보면 탁 트이고 멀고 아득해 보여서 호탕한 흉금을 열 수 있으니, 유자(柳子 유종원(柳宗元) )의 말에 “놀기에 적당한 것이 대개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한 것일 것이다.

내 일찍이 공( 송순 )을 면앙정 위에서 배알하였는데, 공은 나에게 말씀하였다.


“옛날 이 정자가 없을 때에 곽씨(郭氏) 성을 가진 자가 이곳에 살고 있었네. 그는 일찍이 꿈에 자금어대(紫金魚帒)와 옥대(玉帶)를 띤 학사들이 이 위에서 모여 노는 것을 보고는 자기 집안이 장차 일어날 것이요, 그 아들이 이 꿈에 응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네. 그리하여 아들을 승려에게 부탁하여 글을 배우게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또 곤궁하게 되자 마침내 그곳에 있는 나무를 베어 버리고 사는 곳을 옮겼다네. 내가 갑신년(1524, 중종19)에 돈을 주고 이곳을 샀더니, 동네 사람들이 다투어 와서 서로 축하하기를 ‘이 기이하고 아름다운 땅을 공이 마침내 얻었으니, 이것은 아마도 곽씨의 꿈이 조짐이 된 것일 것이다.’ 하였다네. 나 역시 이 산수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였으나 관직에 매여 조정에 있어서 감히 몸을 이끌고 물러나지 못하였다네. 그 후 계사년(1533)에 체직되어 시골로 돌아와서 비로소 초정(草亭)을 엮어 바람과 비를 가리고는 5년 동안 한가로이 놀았네. 그러다가 곧바로 다시 버리고 가니, 이 정자는 비바람을 맞음을 면치 못하였고 다만 나무 그늘이 너울거리고 풀과 쑥대가 무성할 뿐이었네.

경술년(1550, 명종5)에 나는 관서(關西)로 귀양 갔는데, 두려워하고 군색하여 온갖 일을 괘념(掛念)치 않았으나 오히려 정자를 수리하여 그곳에서 늙지 못함을 한으로 여겼다네.

신해년(1551)에 은혜를 받아 방면되어 돌아오니, 옛날 소원을 다소 이룰 수 있었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또 계책을 세울 수 없었네. 하루는 부사(府使) 오공 겸(吳公謙)이 마침 와서 이곳에 함께 올라와 보고는 나에게 정자를 이룰 것을 권하였으며 또 재정을 도와줄 것을 허락하였네.

마침내 다음 해인 임자년(1552) 봄에 역사를 시작하여 몇 달이 채 못 되어서 완공되었네. 집이 대강 완전해지자 숲이 더욱 무성하였네. 나는 이곳에 한가로이 노닐며 굽어보고 우러러보아 여생을 보내게 되었으니, 나의 평소 소원이 이제야 이루어진 셈이네.

아, 내 이곳을 점거한 지가 지금 30여 년이 지났는데, 인사(人事)의 득실은 참으로 말하기 어려우나 정자가 폐지되었다가 다시 일어난 것은 또한 운수가 그 사이에 있는 듯하네. 이 일을 살펴보면 감회가 절로 일어나니 이것을 글에 의탁하여 쓰지 않을 수 없네. 자네는 나를 위하여 기문(記文)을 지어 주게.”


내가 문장이 졸렬하다고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공에게 말씀하였다.

“저 푸르른 하늘을 누가 우러러 떠받들지 않으며 아득한 땅을 누가 굽어보며 밟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소이연(所以然)을 알아서 이것을 자신에게 돌이키는 자는 적습니다. 지금 공께서는 이미 이것을 마음속에 얻고 이것으로 정자의 이름에 뜻을 부쳤으니, 그 호연(浩然)한 흥취는 진실로 일반인은 감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건의 변화는 무궁하고 인생은 한계가 있으니, 한계가 있는 인생으로서 무궁한 변화를 다스리려면, 땅을 굽어보고 하늘을 우러러보는 사이에 천지의 영허(盈虛)하는 이치와 인물의 영췌(榮悴)하는 진리를 마음에 경영하여 스스로 힘쓰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찌 산수의 낙(樂)에만 오로지 할 뿐이겠습니까. 아, 송공이 아니라면 누가 능히 이 정자의 이름에 걸맞을 수 있겠습니까.”


기대승의 두 번째 〈면앙정기〉

면앙정(俛仰亭)은 담양부(潭陽府)의 서쪽 기곡(錡谷) 마을에 있으니, 지금 사재(四宰)로 있는 송공(宋公)이 경영한 것이다. 내 일찍이 송공을 따라 면앙정 위에서 놀았는데, 공은 나에게 정자의 유래를 말하고 나에게 기문을 지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내가 정자의 경치를 보니 탁 트인 것이 가장 좋고 또 아늑하여 좋았으니, 유자(柳子 유종원(柳宗元) )가 말한 “놀기에 적당한 것이 대개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이 면앙정은 겸하여 갖추었다고 할 만하다.

정자 동쪽의 산은 제월봉(霽月峯)인데, 제월봉의 산자락이 건방(乾方)을 향하여 조금 아래로 내려가다가 갑자기 높이 솟아서 산세가 마치 용이 머리를 들고 있는 듯하니, 정자는 바로 그 위에 지어져 있다. 집을 세 칸으로 만들고는 사방을 텅 비게 하였는데, 서북 귀퉁이는 매우 절벽이며, 좌우에는 빽빽한 대나무가 병풍처럼 둘러 있고 삼나무가 울창하다.

동쪽 뜰 아래를 탁 트고는 온실(溫室) 몇 칸을 짓고 온갖 화훼(花卉)를 심어 놓았으며, 낮은 담장을 빙 둘러쳤다. 좌우 골짝으로 이어진 봉우리의 등마루를 따라 내려가면 장송(長松)과 무성한 숲이 영롱하게 서로 어우러져 있어서 인간 세상과 서로 접하지 않으므로 아득하여 마치 별천지와 같다. 빈 정자 안에서 멀리 바라보면 넓은 수백 리 사이에는 산이 있어서 마주 대할 수 있고, 물이 있어서 구경할 수가 있다.

산은 동북쪽에서부터 달려와서 서남쪽으로 구불구불 내려갔는데, 이름은 옹암산(瓮巖山)ㆍ금성산(金城山)ㆍ용천산(龍泉山)ㆍ추월산(秋月山)ㆍ용구산(龍龜山)ㆍ몽선산(夢仙山)ㆍ백암산(白巖山)ㆍ불대산(佛臺山)ㆍ수연산(修緣山)ㆍ용진산(湧珍山)ㆍ어등산(魚登山)ㆍ금성산(錦城山) 등이다. 바위가 괴상하고 아름다우며, 내와 구름이 아득히 끼어 있어서 놀랍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물이 용천(龍泉)에서 나온 것은 읍내를 지나 백탄(白灘)이 되었는데 굽이치고 가로질러 흘러 빙빙 감돌며, 옥천(玉川)에서 발원(發源)한 것은 여계(餘溪)라 하는데 물결이 잔잔하며 맑고 정자의 기슭을 감돌아 아래로 흘러 백탄과 합류한다.

그리고 아득한 큰 들은 추월산 아래에서 시작되어 어등산 밖에 펼쳐져 있는데, 그 사이에는 구릉과 나무숲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으며, 마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밭두둑이 마치 아로새긴 듯하여서 사시(四時)의 경치가 이와 더불어 무궁하게 펼쳐진다.

정자에는 산이 빙 둘러 있고 경치가 그윽하여 고요히 보면서 즐길 수 있고, 밖은 탁 트이고 멀리 아득히 보여서 호탕한 흉금을 열 수 있으니, 앞에서 말한 탁 트여서 좋고 아늑하여 좋다는 것이 어찌 사실이 아니겠는가.

처음에 공의 선조(先祖)가 관직을 그만두고 기곡에 거주하니, 자손들이 인하여 이곳에 집터를 정하게 되었다. 정자의 옛터는 곽씨(郭氏) 성을 가진 자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일찍이 꿈에 의관(衣冠)을 갖춘 선비들이 자주 와서 모이는 것을 보고는, 자기 집에 장차 경사가 있을 조짐이라고 생각하여, 아들을 산사(山寺)의 승려에게 부탁해서 공부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가 성공하지 못하고 빈궁하게 되자 마침내 그곳에 있는 나무를 베어 버리고 사는 곳을 옮겼다.

공이 재물을 주고 이곳을 사서 얻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와서 축하하기를 “곽씨의 꿈이 징험이 있다.” 하였으니, 이것은 조물주가 신령스러운 곳을 감추어 두었다가 공에게 준 것이 아니겠는가. 공은 다시 새로운 집을 제월봉 남쪽에 지었는데, 면앙정과 가깝기 때문이었다.

정자의 터는 갑신년(1524, 중종19)에 얻었고, 정자를 짓기 시작한 것은 계사년(1533)이었으며, 그 후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임자년(1552, 명종7)에 이르러 중건하니, 그제야 탁 트이고 아늑하여 보기 좋은 것이 모두 다 드러나게 되었다.

공은 일찍이 정자 이름을 지은 뜻을 계시하여 객에게 보여 주었으니, 그 뜻은 “굽어보면 땅이 있고 우러러보면 하늘이 있는데, 이 언덕에 정자를 지으니 그 흥취가 호연(浩然)하다. 풍월을 읊고 산천을 굽어보니 또한 나의 여생을 마치기에 족하다.”는 것이었다.

공의 이 말씀을 음미해 보면 공이 면앙에 자득(自得)한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아, 갑신년으로부터 지금까지는 40여 년이 지났는데 그 사이 슬픈 일과 기쁜 일, 좋은 일과 궂은 일이 진실로 이루 말할 수 없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공이 굽어보고 우러러보며 여기에서 소요(逍遙)한 것은 끝내 올바름을 잃지 않았으니 어찌 가상하지 않겠는가.

나는 여기에 이름을 남기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으니 또한 이러한 뜻이 있어서였다. 이에 이 글을 쓰노라.

***

소쇄원瀟灑園은 또 송순이 담양부사할 때 공금으로 지은 것이다. 율곡이 유속으로 공격한 인물들 공통점은

첫째 을사사화 가담자나 추종 세력
둘째, 윤원형, 이기 등에 부역한 자
셋째, 부정부패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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