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미라 이야기/마왕퇴와 그 이웃160 [마왕퇴와 그 이웃-105] 운몽대택 (2) 초왕의 수렵지 운몽대택雲夢大澤은 그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거대한 습지다. 배수가 제대로 되지 않은 지역으로 수많은 호수와 못으로 이루어진 지역인데 황하가 범람하면 주변으로 물이 흘러 넘쳐 거대한 담수호 지역으로 변하기도 하는 등진한 대까지도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는 지역이었다. 대체로 동정호 북쪽에서 무한시, 서로는 형문시까지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 다 포함되어 대택의 전성 당시에는 남한 땅의 절반 정도에 달했다고 하니 엄청난 크기다. 운몽대택은 선진문헌에도 자주 나오는데, 주로 초나라 왕과 귀족들의 수렵지로 나온다. 그 당시 초왕이 사냥하던 모습은 전국책에 보면 아래와 같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战国策·楚策》“于是楚王游于云梦,结驷千乘,旌旗蔽天。野火之起也若云蜺,兕虎之嗥声若雷霆”초왕이 운몽대택으로 사냥을 나갔는데.. 2025. 4. 10. [마왕퇴와 그 이웃-104] 운몽대택 (1) 인구밀도 남북조는 중국사에서 전무후무한 대혼란기였지만 황하 유역에 집중해서 살던 대륙 인구가 화남지역으로 대거 이동을 시작한 첫발이기도 하다. 이전에 올린 아래 지도는 한대漢代 중국 인구인데 이 당시까지만 해도 얼마나 많은 인구가 화북지역에 집중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전국시대 지도를 보면 초나라는 화남 지역에 거대한 땅을 소유한 것으로 나오지만 화북지역에 비해 극히 희소한 인구밀도를 지닌 곳임을 알 수 있다. 마왕퇴 한묘가 등장하던 당시 그 주변은 사람들이 얼마 살지 않는 곳이었던 셈이다. 문제는 단지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다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래 지도를 보면 아래쪽에 장사시가 있고 중간 위쪽에 COVID-19 발생으로 유명해진 우한시가 있는데, 우한시, 창사시, 그리고 형문시를 있는 찌그.. 2025. 4. 10. [마왕퇴와 그 이웃-103] 왜 DNA 연구가 부진한가 남의 나라 연구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하지만, 상대적으로 마왕퇴 한묘의 미라라는 이 거대한 업적에 비해아직 유전학적 연구는 거의 진행된 바 없는 것 같아 이 이야기를 조금 해보고자 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마왕퇴 한묘에서는 미라가 된 시신이 한 분, 그리고 인골이 다른 무덤에서 나와 3기의 한묘 중 2기에서 유해가 발견되었다. 당시는 70년대 초반으로 아직 DNA연구가 활성화하지 않은 때이긴 했지만 그 후에라도 왜 DNA 연구가 더 진행되지 않았을까? 알다시피 중국의 고대 DNA 연구의 수준은 상당히 높다. 마왕퇴 노부인이나 인골에 대한 연구는 중요한 성과를 올릴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연구가 진행되지 않는 이유를 짐작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물론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 2025. 4. 9. [마왕퇴와 그 이웃-102] 리처드 3세: 얼굴복원-2 리처드 3세의 얼굴뼈는 CT촬영 후 컴퓨터 작업으로 머리뼈를 3차원으로 복원 한 후, 이에 대해 얼굴 복원 작업을 시행하였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국과수 이원준 박사가 수행하고 있는 방법과 같다. 그 결과 나온 최종 결과물이 오른쪽 그림이다. 얼굴 형태 자체는 머리뼈에 의해 결정되므로 연구자의 임의로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며다만 눈썹 형태라던가 이런 부분은 초상화 영향이 있을 수 있겠다 생각한다. 눈 색깔과 머리카락 색깔은 DNA 분석 때 어떤 색인지 확인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연구는 우리나라의 경우 을지대 오창석 교수가 이미 조선시대 인골에 대해서 시행한 바 있었다. 아무튼 그런 유전학적 분석 결과를 반영한 것이 바로 위 얼굴 복원이다. 비슷해 보이기도 하는 것 같다. 이 얼굴복원 책임자는 영.. 2025. 4. 6. [마왕퇴와 그 이웃-101] 리처드 3세: 얼굴 복원-1 역사적으로 알려진 리처드 3세의 척추 기형이 뼈에서 확인되었고 모계 유전자가 거의 일치하였으므로 주차장에서 발견된 이 뼈는리처드 3세 뼈라는 것이 거의 확실해 졌다. 마지막 단계는 리처드 3세 두개골이 나왔으므로 이것으로 얼굴을 복원하여 역사적으로 알려진 리처드 3세의 얼굴 모습 (초상화)와 대조해 보는 것이다. 리처드 3세의 얼굴 모습은 1520년에 그려진 것과 16세기 후반에 그려진 것이 각각 남아 있다. 리처드 3세는 1485년에 죽었기 때문에 1520년에 그려진 것은 사망한지 얼마 안 되는 것이긴 한데그림을 그린 사람이 리처드 3세를 직접 봤을지는 의문이긴 하다. 리처드 3세를 그린 그림은 여러 버전이 있긴 한데 대부분 대동소이하다. 2025. 4. 6. [마왕퇴와 그 이웃-100] 리처드 3세: 유전학적 분석-3 유전학적 분석 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 먼저 리처드 3세로 생각되는 인골에서 나온 모계유전자는 리처드 3세의 여동생 Anne of York의 16대 손인 Michael Ipsen과 18대손인 Wendy Duldig의 모계유전자와 각각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일단 역사적으로 알려진 리처드 3세의 모계유전자는 정확히 일치한 것으로 입증된 것이다. 문제는 부계유전자에서 생겼다. 리처드 3세의 4대조인 리처드 3세에서 또 다른 아들 쪽으로 내려간 후손이 리처드 3세의 부계쪽 DNA를 판정하기 위해 선택되었는데 각각 리처드 3세의 19대손, 20대손, 21대손에 해당하는 다섯 명의 남자로 서머셋 집안 (Somerset family)이었다. 문제는 이 사람들 유전자가 모두 리처드 3세와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 2025. 4. 6. 이전 1 2 3 4 5 6 7 8 ··· 27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