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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 이야기440

오슈 후지와라 미라(8): 다이라노 마사카도 말[馬]은 일본에 도입된 시기가 늦어서기 5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대륙 (한반도)에서 들어와 그 흔적을 남기기 시작하는데 서쪽에서 도입되었지만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야마토 조정 말 목장이 대거 동일본, 지금의 관동지역에 설치되는 바람에말은 동일본 상징처럼 되어버린 시기가 있었다. 헤이안시대까지는 일방적으로 당하고 밀리던 동일본은 헤이안 말부터는 힘을 키워 서일본에 대한 반격의 깃발을 올리게 되니 그 첫 단추가 헤이안 말 덴노에 대해 반란을 꾀한 다이라노 마사카도平將門다. 다이라노 마사카도는 앞서 동일본을 정벌한 간무 덴노 5대손으로 한때 후지와라 섭정 치하에서 일을 했다고 알려졌지만 오래지않아 출생지인 동국으로 다시 내려가 그곳에서 야마토 조정에 대한 반란의 신호탄을 올렸다. 이렇게 보면 그는 우리나라.. 2025. 6. 27.
오슈 후지와라 미라(7): 동국東国(あづまのくに)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헤이안시대 북벌로 에미시 땅은 점차 야마토 땅으로 들어왔지만 그 땅은 그 이후에도 東国(あづまのくに, 아즈마노쿠니)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사에 살아남았다. 일반적으로 아즈마노쿠니, 라고 하면 고대에는 야마토 동쪽이라는 뜻이지만 대체로 야마토 판도에 들어와 있지 않은 에미시 땅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일본의 동국이란 에미시가 야마토에 구축되는 과정에서 무력하게 흡수되는 모습으로 볼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 이 지역 사람들은 일본의 중세, 무가정권이 성립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서일본 못지 않은 뚜렷한 족적을 남기게 된다. 헤이안 시대에는 동쪽은 말, 서쪽은 소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동국에는 야마토 정권 말 목장이 다수 설치되었다. 이렇게 이곳에서 키운 말은.. 2025. 6. 27.
오슈 후지와라 미라(6): 기요미즈테라清水寺 이 사카노우에 다무로마로와 관련이 깊은 절이 쿄토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거의 반드시 들리는 기요미즈테라 청수사清水寺다. 절벽에 나무로 기초를 만들고 그 위에 아슬아슬하게 절을 지어 놓은 기요미즈테라는 사실 쿄토가 일본의 수도로 정해지던 시기와 거의 비슷하게 성립한 아주 오래된 절이다. 이 절터에 절이 들어서기 전 어떤 승려가 여기서 관음의 현신을 만났다던가 그래서 여기에 터를 잡고 수양하던 중 아내의 병을 고치기 위해 사슴 사냥에 나섰던 사카노우에 다무로마로를 만나이에 감화받아 여기에 절을 세웠으니 그것이 바로 이 기요미즈테라라는 것이다. 아무튼 조정에 출사한 사카노우에 다무로마로는,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야마토의 병사가 아테루이의 에미시 군 매복에 걸려 크게 패퇴하여 동북 지역 개척이 위험에 처하자 .. 2025. 6. 26.
오슈 후지와라 미라 (5): 사카노우에 다무로마로 일본 막부 최고 실권자를 지칭하는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은사실 무가武家정권에 고유한 것은 아니었고 그 기원은 헤이안 시대에 있다.처음 "정이대장군"을 칭할 때 "이夷"란 일본 동북지역에 거주하던 에미시(蝦夷 에조)를 말한다.우리 통일신라쯤에 일본은 지금의 동북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에미시를 북쪽으로 밀어내는 "북방개척"을 하는데,이 사업에서 현지의 에미시와 계속 군사적으로 충돌했다.이때 나온 것이 이른바 "정이대장군".이 때문에 북방에 무력을 파견하는 조정이 그 군대의 수장으로 임명하는 정이대장군은원래 무가武家와 무관한 공가公家 사람들이 임명되는 일이 상례였다.이렇게 헤이안시대에 임명된 공가 출신의 "정이대장군" 중에 유명한 이가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라는 사람이다. 사카노우에노 다무로마로... 2025. 6. 26.
오슈 후지와라 미라 (4): 아테루이 일본의 동북사 첫머 리를 장식하는 인물에 에미시蝦夷[에조라고도 한다] 대추장 아테루이라는 사람이 있다. 阿弖流為라 쓰고 アテルイ라 읽는다. 일본의 동북지역으로 야마토의 진출은 한국사의 북진정책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에미시를 여진족, 야마토를 한반도 국가로 치환하면 거의 성격이 비슷한 때문이다. 다만 우리의 경우 북진은 항상 이 지역의 종주권을 주장하는 중국측의 간섭이 없었다고 할 수 없지만일본의 경우 야마토 조정이 방해받는 바 없이 북쪽으로 진군해 들어갔다는 것만 다르다. 이 과정에서 에미시도 그냥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고, 야마토 군을 크게 곤경에 빠뜨렸던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아테루이다. 일본의 수도를 쿄토로 옮긴 인물이 바로 간무 덴노桓武天皇[환무천황]인데,이 간무 덴노가 남긴 업적 중에 .. 2025. 6. 25.
오슈 후지와라 미라 (3): 야마토의 북진 일본사에서는 7세기 중반까지도 지금의 동북지역은 야마토의 판도가 아니었다. 사실 이 지점 정도가 당시 일본의 벼농사, 도작의 북방한계선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이 지점을 경계로 남쪽의 벼농사=야마토와 북쪽의 수렵채집 종족=에미시가 대립하고 있던 형국이었다. 위 그림에서 빨간선이 대체로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 서기 7세기 후반, 북방과의 경계선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신기하게도 한반도는 대략 저 붉은 선 경계쯤에서 통일신라와 그 이북의 국경선이 그어지고, 동 시기 일본에서는 거의 비슷한 위도에서 야마토와 동북지역의 경계가 지어져 있었다는 말이다. 통일신라와 야마토의 북방 경계선이 결국 당시의 벼농사와 기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그어진 것을 알 수 있겠다. 각설하고-. 야마토 정권은 서기 7 세기 후반부터 .. 2025.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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