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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2144

한국교회가 왜 성립되었는가, 아직 전혀 규명된 바 없다 한국교회가 어떻게 성립되었는가가 아니라, 왜 성립되었는가, 필자가 아는 한 이에 대해서는 아직 전혀 규명된 바 없다. 단순히 보자면 야훼를 모르고 살던 아시아의 한 국가에 마침내 기독교가 전파되어 들어갔다, 선교사 한 명 보낸 바 없는데 교회의 씨앗이 생겨났으니 이것은 성령의 움직임이요 기적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초기 한국교회의 주역인 인물들-. 특히 초기 한국교회의 이른바 "장로", "집사"급 인물들 - 필자가 여기서 굳이 개신교의 교직의 명칭을 초기 천주교회의 주역들에게 붙인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이들이 왜 일류 성리학자에서 느닷없이 어느날 교회를 만들었는가, 이 부분은 전혀 해명된 바 없다는 말이다. 이것을 조선 유학에 염증을 느끼고 진리를 찾다 보니 교회의 진리를 발견하고 귀.. 2025. 4. 28.
성리철학에 대한 설명에서 시작해야 하는 초기 한국교회사 우리는 한국 초기 교회사를 연 인물들이 당시로서는 일류급 성리학자라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는 것 같다. 필자가 조선후기 성리학의 불임성을 자주 지적하다 보니 이 찬란한 동아시아 중세 철학을 무시하는 것 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성리학의 완성도나 수준은 동아시아 역사상 최고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역으로 말하자면 그 완성도가 높기 때문에 이를 깨고 나오는 것은 성리철학에 침잠해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당시 조선의 일급 성리학자였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교회 건립에 뛰어 들었는지 그 이유를 단지 성령의 역사로만 이해하거나 공리공론 성리철학의 반발로 기독교에 귀의했다고 보는 것 같은데, 오히려 그 반대다. 성리학자가 왜 기독교에 매력을 느끼는가? 사실은 성리철학 자체가 기독.. 2025. 4. 28.
교회사는 미사가 아니다 교회사는 미사가 아니다. 교회사가 개인과 교단의 신심을 확인하는 도구가 될 수 있겠지만 이 논리가 그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쳐서는 안되는 것 아니겠나. 한국의 성리학자들이 왜 18-19세기 엄중한 시기에 굳게 믿어오던 유교적 신념을 버리고 기독교를 택했는가, 그 사상적 동향, 세계사적 의미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는 것을 가장 지금까지 방해해 온 것은 역설적으로 교단이 중심이 되어 수행한 교회사다. 필자의 앞 글, 초기 천주교회는 개신교를 더 닮았다는 이야기, 아마 교회사를 연구하는 분들은 대개 눈치를 채고 있었을 것이다. 누가 봐도 당연한 이야기를 지금까지 전혀 몰랐을 수 있는가? 물론 이러한 관점이 백프로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시각의 이야기가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2025. 4. 28.
개신교와 더 닮은 초기 한국 천주교 이런 생각 해보셨는지 모르겠다. 한국 천주교는 재미있는 해프닝이 있다. 한국 천주교가 자랑스러워 하는 부분이기도 한데, 선교사의 선교 없이 교회를 세웠다는 부분. 선교사나 신부가 오지도 않았는데 신도들끼리 성직자도 정하고 미사도 드리고 성사도 주고 했다는 부분-. 그러다가 북경성당에 확인해 보고 정식 성직자가 아니면 성사를 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생적 교회를 해체했다는 부분인데, 사실 한국 천주교에서는 이 부분을 자랑스러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냉정히 따져 보면 당시 한국천주교회를 세운 사람들 대부분이 성리학자였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다. 왜 그럴까? 성리학에서는 선교사나 사도전승으로 대표되는 스승에서 제자로의 전수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주교.. 2025. 4. 27.
논문 검색의 회고 (4): 온라인에 둥지를 튼 저널들 필자가 대학원 생활을 시작할 당시에는 온라인 저널이란 없었다. 모두 인쇄본으로 출판되고 나면 종이 학술지가 전 세계 도서관에 뿌려졌다. 그러다 보니 MEDLINE에 올라간 저널은 대단한 것이었다 할 수 있다. 2000년대부터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그 여파가 학계를 덮쳤다. 우선 학술지가 온라인 상에 둥지를 틀었다. 원래 학술지에 논문 투고는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출력물을 국제 소포로만 가능했다. 2000년 이후부터는 온라인으로만 투고를 받는 학술지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종이와 우편물로 투고받을 당시에는 투고자로부터 3부의 논문을 받아 한 부씩 심사위원에게 보내 심사를 마치면 다시 편지나 팩스로 결과를 알려줬다. 온라인 학술지가되면서 이 과정이 필요 없어졌다. 온라인으로 투고를 하고, 온라인으로.. 2025. 4. 27.
논문 검색의 회고 (3): 혁명아 앨 고어 당초에 MEDLINE은 원래 전화번호부 만한 INDEX MEDICUS를 보지 않고 간단한 터미널 검색만으로 초록을 확인할 수 있어 이 시스템이 가능해졌을 당시 모두 혁명이라고들 했다. 그런데-. 이 당시까지만 해도 MEDLINE은 공짜가 아니었다. CD는 대학 도서관에 공급되었는데 미국에서 돈을 받고 팔았다. 매년 일정액을 내고 우리나라 의학도서관에서도 MEDLNE을 사용했다. 여기서 앨 고어가 나온다. 앨 고어는 아마 미국 부통령 중 가장 유명하고 가장 대단한 업적을 남긴 사람일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있지만 필자의 전공, 대학에서 연구하는 사람으로 본다면 앨 고어는 혁명아다. 엘 고어는 부통령으로 재직 당시 했던 일중에 여러 가지 중요한 성취를 했는데그 중에서도 필자와 관련하여 가장.. 2025.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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