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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2413

김득신 강상회음을 보며 간흡충을 떠올리다 이 김득신金得臣(1754~1822)의 강상회음江上會飮.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 그림에서 등장인물들은 아무리 봐도 생선을 구워 먹는 것 같지가 않다. 일단 생선을 구운 풍로나 불이 주변에 없고, 왼쪽 아래 등장인물은 생선회 몇 점을 채소와 섞고 있는 것 아닌가? 조선시대 일기를 보면민물생선 잡으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회쳐 먹는 장면인 것이 이색적인데, 당시 생선회 레시피 중에는 생선회를 잘게 썬 채소와 섞어 여기에 간장등을 넣고 비벼 먹는 요리가 있다. 생선회는 꼬리와 내장을 제거하고 껍질을 벗겨 썰어서 백지 위에 펼쳐 놓아 물기를 말리는데 이때 실처럼 가늘게 썬다. 무를 가늘게 채를 썰어 헝겊에 담아 쥐어 짜내어 생강, 마늘 약간과 머물러 생선회를 접시에 담아서 겨자, 고추, 식초를 뿌린다.이.. 2025. 9. 2.
19세기 중반까지도 수십 수백을 노비 사역시키는데 17세기 사료에서 자본주의 맹아를 찾는 일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18세기 말에도 우리나라 향촌에는 노비가 바글바글한다. 여기서 어떻게 농민이 분해되어 광작하는 차지농이 생긴다는 건가? 이 광작하는 차지농은 생산물을 화폐경제하의 시장에 내다 판다 이것일진대, 내다 팔 시장이 있어야 팔 것 아닌가? 광작 따로, 일기따로, 맹아 따로, 호적 따로인가? 지금처럼 19세기 중반까지도 향촌사회에서 수백명 노비를 사역시키는 풍경이 확인되는 한 내재적 발전론, 자본주의 맹아론 따위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절대로 믿을 수 없다. 당최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 [편집자주] *** 저런 땅부자가 조선 곳곳에서는 있었다. 이들을 이른바 광작운동 증좌로 들지 모르겠다. 하지만 저런.. 2025. 9. 2.
1860년대까지도 노비 수백명을 부린 어느 명문가 앞서 이야기한 바처럼 19세기 들어오면 대개의 경우 소농질서로 재편되어 한 마을에 유학이 급증하는 등계급해방의 징후가 매우 뚜렷해지는데이런 것도 동네마다 차이가 있어서 매우 높은 신분의 양반이 살던 동네에는1860년대까지도 한 호 당 노비가 100명 이상 사역하여 그런 일족의 호가 10여 가는 모여 있는 듯한데 노비의 수가 필자가 보기엔 줄잡아도 800-1000명은 되어 보인다. 이런 마을에는 대개 신분 해방도 없다. 신분 해방이라는 것도 만만한 고만고만한 양반들이나 양반호소자들이 모여사는 동네에서나 쉽게 되는 것이지제대로 된 양반들 사는 동네에서는 이것도 쉽지 않았음을 알겠다. 1860년대면 바야흐로 미국에서 노예해방 문제로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되 그 나라에서는 아무리 피부색이 다르더라도 사람은 .. 2025. 9. 2.
호적만으로 더 이상 지배자가 구분 안되는 시기-19세기 18세기 이전에는호적만으로도 양반 구분이 쉽다. 우선 양반의 직역인 유학, 그보다 하나 아래이지만 어쨋건 양반 취급 받아 군역 면제인 업유,업무, 교생 등 이런 직역을 받아 호적에 적힌 사람도 많지 않은 데다가, 이런 양반들은 모두 많게는 20-30명에서 적어도 5-6명의 노비를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딱봐도 양반인걸 안다. 그런데 19세기 들어오면지금 우리네 주민등록 등본처럼 호적만 봐서는 이 사람이 도대체 양반인지 평민인지, 아니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도 분간이 쉽지 않다. 모두 비슷한 크기의 가구로 나뉘어 호주가 되어 있고, 이들 사이에는 아마도 지주-전호제로 소작관계가 형성되어 있을 텐데그러한 관계가 적어도 호적에서는 파악이 안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18세기 이전도 노비를 20-30명 거느리고 .. 2025. 9. 1.
왜 양반 수는 불어만 가는가 조선후기 양반 수가 불어가는 이유 중에 한 가지는우리는 기존의 양반들 후손들이 예를 들어 벼슬길이 오래 끊기거나 아니면 서자 집안이라 제대로 된 양반에 결격사유가 생기면 순순히 우리는 양반 아니오 하고 내려갔을 것 같지만천만의 말씀이다. 조선시대 호적을 보면, 한번 양반 후손들은 순순히 양반 자리를 내놓지 않는다. 특히 호적에 유학, 그게 아니면 양반의 끝자리인 업유, 업무라고 적는데 민감하여결사적으로 이에 달라 붙어 쉽게 내놓지 않는다. 어쩌다 호적을 좀 빡빡하게들 조사했는지원래 유학이었다가 업유나 업무, 재수 없으면 선무군관으로 밀렸다고 치자. 다음번 호적 때는 반드시 유학으로 원상 복귀를 시도한다. 당대에 안되면 아들이라도 아버지 직역을 학생으로 반드시 고쳐 놓는다. 그도 그럴것이 호적에 유학으로 .. 2025. 9. 1.
뒤 늦게 불 붙은 장작 우리나라 호적은 시계열 자료로 17세기부터 19세기 까지 남아 있는 것이 전국에 몇 군데 안된다. 이 몇 군데 안되는 자료로 조선후기의 계급의 변동에 대한 대부분의 논문이 나온다. 하지만 이 지역들이 조선 전체를 반영하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조선후기의 농업발전에 있어서 현재 호적이 남아 있는 곳이 낙후되었던 지역이 아니라 이앙법이 도입되는 단계부터 수리시설의 증대까지 당시 전국을 주도하는 입장에 있었던 지역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 지역이 낙후되었기 때문에 노비가 그렇게 많았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이앙법 도입만 해도 이 지역이 전국에서 가장 빨랐다. 이 17세기 부터 19세기까지 시계열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는 뒤늦게 불붙은 장작이다. 일본과 비교한다면 옆나라는 17.. 2025.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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