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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노년의 연구384

[연구 소식] 일본인류학회 발표 국립청주박물관 이양수 관장, 경상국립대학교 박물관 송영진 선생과 함께 韓国の考古学から見た弥生人の原郷 이라는 제목으로 시모노세키에서 열리는 79회 일본인류학회에서 발표하게 되었다. https://www.kuba.co.jp/anthropology79/index.html 2025. 9. 5.
19세기 유학모칭자들 우리나라 18-19세기에 향촌사회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소위 유학 모칭자들-. 이들은 숫자도 많고 신분 상승의 욕구도 강하여19세기 후반 이미 뚜렷한 입지를 드러내는데, 과연 조선 후기의 각종 차별을 뚫고 입신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다. 이들은 구한말의 거쳐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이들의 그 이후 추이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연구를 필자는 본 적이 없다. 일제시대 활발한 활동을 하던 한국인이 19세기 유학 모칭자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해방 이후 활동하던 사람들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면밀하게 따라가는 연구를 본 적이 없는 까닭이다 다만 필자의 막연한 추측이기는 하지만이들이 19세기, 유학호를 참칭하며 신분상승을 꿈꾸며 벌이던 그 강렬한 에너지와 물불 안 가리는 행각을 생각하면, 이들은 20세기 .. 2025. 9. 5.
메이지 초기를 지배한 출세주의 (2) 메이지 시대, 하면 우리는 아무래도 식민지배의 기억이 있어서이 시대는 제국주의자들의 시대, 라고 정의하기 쉽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메이지시대의 초창기는 조금 다른 각도에스의 조명도 필요한 것이, 이 메이지 초기는 막부를 쓰러뜨리고 개국개화의 국가적 대전환 위에 막부편에 섰던 사람이나 아니면 신정부 편에 섰던 사람이나 극소수의 벌열이 된 이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쪽박 차고 시작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여 극도로 빈핍한 이들이 공부 하나로 출세해보겠다는 기풍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던 대였다. 이 시기에 일본의 교육제도라는 건 근대적이라고 보기 일천하여 허술하기 짝이 없었는데 아래로는 소학교에서 위로는 대학까지 졸업생도 없고 가르칠 선생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만들어가며 교육하는 상황이라 어제까지 교육생.. 2025. 9. 5.
메이지 초기를 지배한 출세주의 (1) 일본 메이지 시대 초기를 보면, 눈에 띄는 것은나도 이제 막부가 쓰러졌으니 출세 한 번 해보자는 것이 되겠다. 에도 막부 300년은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할 일이 명확히 정해져 있고내가 받을 녹봉이 정확히 정해져 있어사무라이들은 위로는 쇼군부터 아래는 말단 하급 무사까지뭐를 해야 하고 얼마나 받을지가 정확히 결정되어 있었다. 이 녹봉이 너무 작은 경우 요샛말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벼락출세도 없었고또 하지말라는 거 안 하고 잘 보신주의로 버티면벼락 몰락도 거의 없었다. 한때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칼을 뽑았다가는 나는 물론우리 후손 대대로 먹을 녹봉을 날릴 판이라, 무사는 농민이 약올리면 죽여도 된다고 했지만아무도 그 말을 믿고 칼을 뽑는 이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얼씨구나 하고 위에서 .. 2025. 9. 5.
18-19세기 "향촌중인"과 현대 한국의 중산층 현대 한국인은 우리나라가 빈부차가 크다고 생각하지만다른 나라 다녀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한국의 힘은 이처럼 매우 두터운 중산층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각설하고, "한국의 중산층의 기원"은 무엇일까? 한국 중산층이 결국 한국의 산업과 근대화의 횃불을 든 사람들이라 생각했을 때한국 중산층의 기원을 밝혀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향촌에는 원래 "양반"과 "평민-노비-천민" 밖에 눈에 띄는 게 없었다. 여기에 아주 얇은 층으로 "향촌중인"이 존재했는데 그 대부분은 "양반의 서자들"이었다. 이들은 조선 초-중기까지도 강고했던 서얼금고 때문에 조상 중에 한 명이라도 서자가 있으면 몽땅 과거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하층 관직을 전전하며 차별받는 층으로 묶였다. 이들이 바로 "초기 향촌중인".. 2025. 9. 5.
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 일본 동경에는 고라쿠엔後楽園이라는 곳이 있다. 여기는 지금 무슨 경기장인지 체육관인지가들어서서 거기에 이름 붙어 우리에게 유명하지만여기는 원래 에도시대 무슨 영주의 정원이었다. 그 정원의 이름이 고라쿠엔인데, 유명한 북송의 대 유학자, 존경해 마지않은 범중엄 선생의 일갈, 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에서 따온 것이다.에도시대 무사들 입에서 후락원後楽園이라는 말이 나오는거 자체가이미 이 시대 일본 무사란 더이상 전국시대 칼잡이 무사가 아니며이데올로기를 장착한 지사로 진화했다는 거을 의미한다. 한국의 19세기 향촌사회. 그 혼란과 에너지의 멜팅 폿에서 불과 몇 년 후면 진주민란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에서 묵묵히 자기 땅에서 노비 수백명을 1860년대까지도 사역시키던 소위 양반들은, 과연 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 2025.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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