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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노년의 연구383

동학혁명은 "유학모칭자"들이 주도했다 동학혁명은 필자가 보기엔 19세기에 급증하여 많게는 인구의 절반 가까이까지 차지했을지도 모르는,"유학모칭자"들이 주도했다고 본다. 이들은 기본적인 문자 해독 등 어느 정도의 독서층이고, 사는 것도 다른 이들보다 나은 사람들, 그리고 19세기가 될 때까지 양반들의 집요한 견제를 뚫고 마침내 유학을 모칭하는 데까지 이른 장난 아닌 사람들이라, 19세기 말 정부를 뒤엎겠다고 들고 일어날 사람들은 그 규모나 성정으로 볼 때 이 사람들 아니면 할 만한 사람들이 없다. 이 안에는 당연히 농사를 자기 손으로 짓는 사람도 있었을 터이고, 유학까지 따냈으니 다음 단계로 소과 정도는 급제자도 많이 나왔을 터, 동학혁명이 아래로는 농사꾼에 위로는 진사까지도 참여하였다고 하는데, 이 모든 사람을 하나로 아울러 그 성격을 정의.. 2025. 9. 6.
동학농민혁명을 "동학혁명"으로 불러야 네이버가 제공하는 옛날 신문 등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지금의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이름은1980년을 거치며 1990년대 초반부터 보편화한 명칭이다. 그 이전에는 그냥 "동학혁명"이라 불렀다. 동학혁명이 필자가 보기엔 보다 학술적으로 훨씬 더 중립적인 명칭이다. 여기에 그 정체도 불분명한 "농민"을 굳이 동학혁명의 명칭 안에 집어 넣은 것은1980년대 분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렇게 그 당시 불렀다고 해도 그건 사회적으로 그럴 필요가 있다고 치고, 지금은 이 명칭을 유지할 이유가 없다. 완전히 타성적으로 이 명칭을 유지하는데, 정체도 불분명한 "농민"을 이 안에 넣어놓으니까이 혁명의 역사적 의미가 정확히 구명이 안 되고 제자리를 맴도는 것이 아니겠나. 왜 1980년대를 거치며 동학혁명의 이름에 농민짜가.. 2025. 9. 6.
아직 제대로 된 호칭조차 없는 19세기 유학모칭자들 19세기 유학모칭자들, 이라고 하지만이 숫자는 거대하다.많게 보면 전체 조선인구 절반 가까이 될 수도 있으며 적게 봐도 30프로는 넘는다. 그도 그럴 것이 많아 봐야 인구의 20프로를 넘지 못하던 유학호가 19세기 중 후반에 이르면 인구의 60-70프로에 달하게 되는 탓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무더기로 유학호를 달게 되었는데우리나라는 아직도 이들을 부르는 호칭조차 변변한 게 없다. 그 당시부터 돌이켜 보자면, 놀고 먹는자들, 군역회피자, 향촌의 중인, 등등이 이들에 대한 호칭이며현대 한국의 학계에서도 유학모칭자, 항촌 중인, 등등을 비롯해 가짜양반에 이르기까지다양한 호칭이 있지만 무려 인구의 절반에 육박할지도 모르는 이 사람들에 대해 통일된 호칭이 없다. 이와 대응하여 가장 많이 쓰이는 호칭이 잔반일 .. 2025. 9. 6.
호적을 보면 매우 이상한 균역법 1750년 이후 조선시대 호적을 보면균역법의 실체에 대히 의문을 갖는다. 이거이 실제로 제대로 시행되었던 것일까. 매우 의심스럽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균역법 실시이후 선무군관 숫자가 너무 적다. 실록인지 어딘지 기록에 의하면 균역법을 실시하면 정부 수입이 줄어드니까 이를 메꿔 줄 선무군관은 정부에서 도별로 숫자를 정해 위에서 반드시 채우라고 내려 꽂았다. 그런데 막상 향촌의 호적을 보면 선무군관이 몇 없다는 말이다. 선무군관을 받으면 직역이 그 이전에 유학이건 업무건 업유건 간에선무군관으로 바뀐다. 거의 백프로 이전에는 갖은 방법으로 군역을 회피하던 소위 향촌의 중인들이 대거 충원되었어야 정상인데막상 호적을 보면 선무군관으로 잡혀 들어간 사람이 몇 안 된다. 그나마 이 사람들도 그.. 2025. 9. 6.
호적에서 보는 균역법 균역법은 1750년, 영조 26년에 공포되었다. 온라인의 나무위키 글을 따서 옮겨보면 이렇다. 인정(人丁) 단위로 2필씩 징수하던 군포(軍布)를 1필로 감해주고, 대신 균역청을 설치하여 줄어든 세원을 보충하는 정책을 실행하도록 했다. 왕족이나 권문세가, 지방 관아에서 세금을 매겨오던 어전(漁箭), 염분(鹽盆), 곽전(藿田), 태전(苔田)과 선박에 대해 국가에서 세금을 거두게 하였다. 그리고 토지마다 1결당 2말의 결작미를 징수하였는데, 이는 군역의 부담이 전세로 바뀌게 된 셈이다. 일부 상층 평민을 대상으로는 선무군관제에 따라 선무군관이라는 지위를 주어 선무군관포 1필을 납부하게 하였다.요약하면 군포를 노상 내던 평민들 2필을 1필로 감하는 대신, 새로 1필을 내는 사람들을 뽑아 손실분을 메꾸게 했다 이.. 2025. 9. 6.
[연구 소식] 일본인류학회 발표 국립청주박물관 이양수 관장, 경상국립대학교 박물관 송영진 선생과 함께 韓国の考古学から見た弥生人の原郷 이라는 제목으로 시모노세키에서 열리는 79회 일본인류학회에서 발표하게 되었다. https://www.kuba.co.jp/anthropology79/index.html 2025.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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