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2393 광개토왕의 남정이 사서에서 빠진 경위 현재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는 김부식이 손을 많이 댔다기 보다, 전해 내려오는 고구려 사료를 많이 그대로 인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예를 들어 고구려본기 앞부분은 신집의 내용을 그대로 받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나 보다. 그런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조 기록을 보면, 전술한 바와 같이 광개토왕의 남정기사, 백제 아신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은 사실,신라의 요청으로 출병한 사실, 왜병을 신라영토에서 구축하고 가야까지 쫒아갔다는 사실 등 일련의 기록이 누락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백제와의 기록이 전무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남정기사 이전의 기록은 매우 상세하다. 그렇다면-. 광개토왕비에는 있었던 남정기사가 언제 기록에서 누락되기 시작했을까. 이를 추정해 보면, 첫 .. 2024. 8. 16. 광개토왕의 남정은 왜 교차검증이 안되는가 결론을 말하자면 이렇다. 호태왕비를 액면 그대로 취신하는 흐름은 아래 두 개의 토대 위에 있다. 첫째는 일본의 입장-. 무엇보다 신묘년 조 때문에 호태왕비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사료이다. 특히 호태왕비는 당시 한반도의 정세를 고구려와 왜, 두 세력의 대결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사의 입장에서도 반드시 취신해야 하는 사료가 되겠다. 둘째는 우리의 입장-. 무엇보다 고대사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한국의 입장에서 서기 5세기 당대의 문자 자료라는 점에서 도전을 불허하는 측면이 있다. 비록 비문을 보면 백제와 신라, 가야가 골고루 망신을 당하고 있지만, 어차피 최후의 승자가 같은 한민족 국가인 고구려인데 어떠랴? 다만 신묘년 기사가 문제인데, 그것만 잘 방어하고 나머지는 모두 취신할 만하겠다. 그런데 .. 2024. 8. 16. 광개토왕비와 신공 49년조: 일관성의 딜레마 앞에서 일본서기 신공 49년조와 광개토왕비는 사실 거의 비슷한 구조의 글이라는 점을 이야기했다. 하나는 근초고왕 시대에 있었다는 남정을 일본의 시각에서 본 것으로, 근초고왕 시대에 백제가 전남 지역까지 정치적으로 통합했다는 근거로우리측에서 이 기록을 이용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측에서 이 기사를 이런식으로 믿는다 해도,정작 왜의 시각-. 즉 백제가 남정 이후 왜를 주인으로 섬기기로 했다는 부분은 우리가 또 믿지 않는다. 같은 기사에서 어떤 것은 믿고 어떤 것은 믿지 않은 셈이다. 이번에는 광개토왕비를 보자. 광개토왕비의 내용, 특히 이 시대 광개토왕의 남정기사 일체,백제에게서 항복을 받았다던가, 신라의 요청으로 고구려군이 가야까지 종횡무진 활약하며 정벌하고, 인심좋게 신라 수병에게 .. 2024. 8. 16. 신라를 정벌했다는 일본서기 신공황후 49년 조의 경우 이제 광개토왕 비문 시각으로 맨 밑에 첨부하는 일본서기 기록을 보자.어떠한가? 알다시피 일본서기는 우리 삼국사기보다 성립연한도 더 빠르다. 아래 기록이 과연 호태왕비문의 광개토왕 남정기사와 어느 정도로 차이가 있는 것일까? 아, 물론 광개토왕의 남정기사건, 신공황후 49년조이건 간에 양쪽 모두 삼국사기에는 없다. 호태왕비에서 고구려인의 시각은, 신공 49년조에서 왜인의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글을 읽어보면 매우 비슷하구나, 하는 점을 느낄 것이다. 이 신공 49년조의 기록은 사실일까? 아니면 어떤 사실을 뻥튀겨 쓴 이야기일까? 호태왕비와 신공황후 49년조는, 둘 다 한국 기록에는 없지만 자국의 승리를 크게 특필해 놓았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는 그대로 믿고, 다른 하나는 거짓이고 왜.. 2024. 8. 16. 동성왕과 함께 온 왜병 500인 잘 알다시피 동성왕은 곤지의 아들로 원래 왕위를 이을 수 있는 차례가 아니었는데 개로왕 대에 한성백제의 멸망으로 인해 생각지도 않게 그에게도 왕위에 오를 기회가 왔다. 왜에 있던 동성왕이 귀국할 때 그를 호위하기 위해 따라 들어온 왜병이 있었는데 그 숫자가 일본서기에 의하면, 500명이었다. 눌지왕 때 "신라에 주둔"했다는 고구려병 100명은 애초에 속국 지배용으로 보기에는 숫자가 너무 적었던 셈이다. 눌지왕이 신라영토 내의 고구려병 100명을 죽이게 한 첫째 이유는 그렇게 해도 될 만큼 그들의 숫자가 미미했기 때문이라 하겠다. 우리는 호태왕과 충주 고구려비의 내용, 신라가 고구려에 보낸 인질, 그리고 신라땅에 주둔했다는 고구려군만 보고 신라가 이때 고구려의 속국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이때 신라가 인질을 .. 2024. 8. 15. 속국 신라에 보냈다는 고구려 병사 100명 흔히 4말5초 광개토왕의 남정 이후 고구려는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고, 군대까지 주둔시켰다고 한다.이 이야기는 일본서기가 출전이다. 한국사 기록에는 필자가 아는 한 관련 기록이 없다. 그 이야기 내용을 보면유명한 "수탉을 죽여라"라는 바로 그 이야기다. 귀환하는 고구려 장교가배웅하는 신라인에게니네나라 조만간 없어질 것이다 하니, 그 이야기를 신라왕에게 전해주어신라왕이 남아 있는 고구려 병사를 깡그리 죽여버리라고 했다는바로 그 이야기다. 그런데-.이 당시 고구려 군이 신라땅에 몇 명이 있었을 것 같은가? 백명이다. 이 이야기가 나와 있는 출전인 일본서기에 나와 있으니 수탉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이 말도 맞을 것이다. 고구려군의 신라주둔 이야기? 물론 필자가 아는 한 삼국사기에는 그런 이야기 없다. 이 이야기는 .. 2024. 8. 15. 이전 1 ··· 118 119 120 121 122 123 124 ··· 399 다음 반응형